붓-싼의 해운대블루라인파크

길고 충실한 1독평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서평(?) 작성 속도가 독파 속도보다 느려서, 독후감 써야할 책이 쌓여있다. 긴 서평은 다회독하는 책에 대해서 쓰기로 하고, 1독평은 가급적 30분 이내로 쓰기로 하자.

그리고 예규판례 정리하기도 은밀히 품고 있던 욕심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법률 대중도서 몇권 읽으면 줏대가 서려나.

스스로 설정한 목표치가 과하니 기대치를 낮추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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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데 장장 130여일이 걸렸다. 
 
원서로 읽었던 탓도 있겠지만, 외견상 스토리가 건조하여 쭉쭉 진도를 빼기 힘들었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짜임새가 있고, 줄거리가 느슨한 듯 하면서 흥미진진했다. 1920~30년대 미국 금융사, 예술, 의학의 발전, 비밀스러운 부부의 가정사가 이렇게 곱게 갈려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다니. 작가 에르난 디아즈의 리서치 능력과, 또 알아낸 지식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는 구상력에 존경을 표한다.
 
스포일러가 아닌 것 같아서 말하자면,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파트가 단 하나의 사건 (재벌금융가 부부의 사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서술자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인데,

  • 1부 '채권' ('Bonds')은 한 작가가 해당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
  • 2부 '나의 인생' ('My Life')은 그 소설로 자신이 가십거리가 된 것에 발끈한 남편 (앤드류 베벨)이 작성한 자서전,
  • 3부 '회고록을 기억하며' ('A Memoir, Remembered')는 앤드류 베벨이 자서전을 작성하게끔 보조해준 비서의 이야기,
  • 4부 '선물' ('Futures')은 그 논란의 중심인 앤드루의 부인 (밀드레드 베벨)이 쓴 일기이다.

소설 속의 소설인 탓에 1부의 인물명이 다르다.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걸려 넘어지는 것 같다. 
 
⟪Trust⟫ 는 책을 읽어야 겠다는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워준다. 4부에 언급된 도서 (버지니아 울프의 플러시 포함)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들도 읽고 싶었고, 스위스의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밀드레드를 지켜보면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도 읽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 소설 ⟪Trust⟫를 한번 더 읽고 싶다.
 
국문으로 번역된 ⟪트러스트⟫는 밀리의 서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국문본은 읽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번역된 문장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나간 사람은 결국 이 책의 진가를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Morning brought out a deeper sort of white from the changeless snows capping the peaks the peaks on either side of the valley, which, later, in the midday sun, would become blinding splinters. A pastoral bell echoed across the sky dappled with flocks of small solid clouds, while unseen birds found themselves, yet again, unable to break their bondage to their two or four notes. The air was laced with the scent of water, stone, and the long-dead things that, darkly, were finding their way back to life deep under the dew-soaked dirt. During that unpopu lated hour, the buildings ceased to be objects of artifice and industry to reveal the nature fossilized in them and come forth in their mineral presence. The breeze dissolved in stiller air; the treetops, so green they were black against the blue, stopped swaying. And for a moment, there was no struggle and all was at rest, because time seemed to have ar rived at its destination.

아침이 되자 계곡 양옆의 높다란 봉우리를 덮은 만년설에서 더 깊은 흰색이 우러나왔다. 나중에 오후의 햇빛을 받으면 그 흰빛은 눈이 멀 듯 길쭉한 가시가 될 터였다. 작고 단단한 구름떼로 얼룩진 하늘에는 목장의 종소리가 울려퍼졌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새들은 이번에도 겨우 두 가지 혹은 네 가지 음밖에 내지 못하는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기에는 물과 돌, 오래전에 죽어 이슬에 젖은 흙 속 깊은 곳에서 다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들의 향이 깃들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그 시간에 건물들은 더이상 기술과 산업의 대상이 아니게 되어 그 안의 화석화된 자연을 드러내고 광물로서의 존재감을 띤 채 앞으로 나섰다. 산들바람이 비교적 고요한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너무 푸르러서 하늘의 파란색을 배경으로 검게 보이는 숲의 꼭대기도 흔들리기를 멈추었다. 잠시 아무것도 몸부림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결국 목적지에 이른 것만 같았다. 

- 'Bonds'의 chapter 4
The mass production of the automobile created a phenomenal cir- cle of prosperity, in which consumption and employment fueled each other. A number of adjacent industries, from oil refineries to rubber factories, flourished around the motor car. Millions of miles of roads were paved. Fleets of trucks expedited commerce. At the beginning of the century there were some 8,000 cars registered in the United States By 1929 that figure had risen to almost 30,000,000.

자동차 대량생산은 놀랄 만한 번영의 원을 만들어냈는데, 그 안에서 소비와 고용이 서로의 연료가 되었다. 정유에서 고무 제조에 이르는 수많은 연관 산업이 자동차를 중심으로 번영했다. 수백만 킬로미터의 도로가 포장되었다. 트럭 부대가 상업을 촉진시켰다. 그 세기가 시작할 때는 미국에 등록된 자동차가 8,000대를 좀 넘었다. 1929년에는 그 숫자가 거의 30,000,000으로 불어났다. 

- 'My Life'의 chapter 'A Destiny Realized'
It is not unlikely that I am still bound to confidentiality by that I ed agreement. This particular document has not come up in my archival research into Bevel's papers so far. The estate's counsel has told me that the law firm held on retainer back then no longer exists. And this is as far as I intend to take the matter.

내게 지금까지도 그 계약에 의한 비밀 엄수의 의무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껏 내가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본 베벨의 서류에서는 그 특정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저택의 자문 변호사는 당시에 의뢰를 맡았던 법무법인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정도 선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 'A Memoir, Remembered'의 chapter II-2
I'm Adam, Eve. Mad, am I?
D F# E A / A E F# D

나는 아담이다, 이브. 미쳤나, 내가I’m Adam, Eve. Mad, am I?
D F# E A / A E F# D 

- 'Fu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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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떠한 생각에 꽂혀 있는데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일단 시도해 보겠다.

 

테니스에는 Best efforts rule이라고, 경기에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ITF 2023년 Code of Conduct M항).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규칙은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많이 적용되리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고있는 팀이나 선수가 '어차피 질 텐데 뭐하러 에너지를 낭비하나'라는 생각에 불성실하게 경기에 임하게 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관객은 굉장히 수준 낮은 경기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경기의 박진감이란, 실력이 더 좋은 선수나 팀에게 달려 있기 보다는 실력 (혹은 컨디션)이 떨어져서 경기를 지고 있는 선수나 팀에게 달려 있다. 언더도그가 경기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관람객은 그 경기를 볼 이유가 없다. 

 

보통은 언더도그에게 best efforts rule 준수를 더 요구하곤 하지만,  높은 랭킹의 선수가 태업을 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2018년 Shanghai Masters 1회전에서의 닉 키리오스 (Nick Kyrgios)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는데... 당시 ATP랭킹 38위인 키리오스가 예선전을 겨우 통과한 선수 Bradley Klahn를 상대로 패한 것이다. 여기서 묘한 부분은, (아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Bradley Klahn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키리오스가 좀체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지 않아 일어난 결과였다는 점이다. 


(하긴 키리오스는 소문 나기로 멘탈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마냥 우세한 위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악마의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안한 멘탈 때문에 모든 경기에서 언더도그인 키리오스는 대체...)

 

선수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경기의 관람가치가 매우 떨어지게 되듯이, 인생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명제는.. 높은 확률로 진실일 것이다. 그런데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있는 힘껏 꾹꾹 눌러밟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볼 수 있는걸까?

 

동호회에서 테니스 경기를 할 때, 나만의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치면 보통 포인트를 잃는다. 강한 스트로크와 독특한 앵글로 포인트를 따내려고 하지만 오히려 나의 범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반면, 오히려 살살 칠 때 포인트를 왕왕 따게 된다. 저쪽의 동태를 계속 살피면서 주워넘기다 보면 상대방이 실수해서 포인트를 내주거나, 상대편의 빈틈이 생겨서 그리 강한 샷을 때리지 않아도 손쉽게 포인트를 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살살 쳐야 한다거나 하는 단순한 교훈으로 결론 지으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느낀 점은 내가 내멋대로 그 포인트의 향방을 결정짓기 전에 이미 그 포인트에 내재된 밑그림이 있기 때문에 그 시그널을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이사야서 31장 1절)

 

꾹꾹 눌러쓰고 꾹꾹 눌러밟고 두손 주먹을 꽉 쥐고 양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인생의 왕도라고 생각해왔었다. 그것만이 내 진지함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믿었다. 과거에 나는 내 노력과 고통의 양이 중요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의 나는 노력의 극대화 이전에 이 상황에서 내가 정말로 무엇을 하거나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 에 대한 밑그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안다. 성경 특히 구약말씀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가 많다. 여기서는 노력의 양은 전혀 상관없는듯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노력(애굽으로 내려감, 우상숭배, etc.)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action 혹은 inaction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은 text는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text를 그대로 읽어나가면 되는 reader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다 정해져 있으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는거냐, 우리가 주체성이 있기는 한거냐? - 라는 문제의식이 뒤따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는 책의 text가 pre-defined되어 있으니 독자로서의 주체성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좋은 책을 읽은 독자(reader)는 텍스트가 고정되어 있다며 답답함을 느끼기 보다는 정신적인 고양감에 사로잡힌다. 지혜로운 독자(≒신자)는 그 끝에 충실한 기쁨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기에 텍스트(≒성경말씀, 혹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밑그림)을 성실하게 읽어나간다. 

 

그래서 best efforts rule을 가장 잘 준수하는 방법은, 상황상황마다 깔려 있는 하나님의 밑그림을 헤아리려는 품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력의 극대화는 그 다음 문제이다. (실은 노력도 하나님께서 그 적정량을 정해두셨을거란 생각이 든다.)

 

역시 내가 생각한 바를 다 표현하지 못했다.. 아직 생각이 여물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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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희랍어 시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장르의 문제라고 분명히 해두어야 겠다. 온갖것에 예민해진 나는 지루한 컨텐츠는 참고 보아도, 보디호러는 이제 두눈 뜨고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작품성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묘사를 하는 데 있어 한강은 가히 천재적인 필력을 보여주기 때문. 그녀의 텍스트를 읽다보면 어떠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내게는 썩 유쾌하지 않았던 탓에, 한강의 다른 작품을 선뜻 집어들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실어증에 걸린 수강생 여자의 이야기를 읽기가 힘들었다. 그녀를 괴롭힌 억울한 사건들 (그녀를 물어버린 백구, 이혼과 양육권 패소 등) 안에서 그녀가 겪은 정신 붕괴, 문자가 해체되는 듯한 그 아득함을 함께 체험하는 느낌이라 힘겨웠다. 분량이 많지 않았는데도 읽는 속도가 느렸던 이유이다.
 
이미지가 주는 임팩트는 꽤나 강렬해서, 실제 실어증 환자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인지 진위 여부는 뒷전으로 밀린다. 더군다나 등장인물의 경험에 한정된 개별성을 주장할 경우, 실어증의 진상은 이 소설에서 힘을 잃게 된다. 이미지의 힘은 인정하지만, 아니 오히려, 이미지의 강력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지배적인 컨텐츠가 꺼려진다.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안 주는 것 같아..
 
적어도 희랍어 강사는 밝은 면이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서서히 사그라드는 촛불 같은 존재였다. 수강생 여자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젖은 장작 같은 느낌이었는데, 글쎄, 희랍어 강사의 불씨가 말잃은 여자를 소생시켰을까?
 
별로 궁금하진 않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 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Ch 2 '침묵'

 

(...) 동양에서 온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희랍어는 달랐어.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 수 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 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네가 말한 그런 이유로 나는 플라톤의 전도된 세계에 이끌렸던 걸까. 그보다 먼저,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 Ch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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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서림에서 장 에슈노즈의 책 ⟪달리기⟫를 처음 접했다. 언뜻 보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코의 한 달리기 선수 에밀 자토펙의 육상종목 커리어에 할애한 소설 같아서 흥미가 동했다. (그런데 에밀 자토펙은 실존인물인데, 왜 소설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걸까? 김훈 ⟪칼의 노래⟫와 같이 역사소설로 보는 것일까.)

 

이지웅 목사님의 저서(링크)에 이어, 이 책도 현재로서는 절판된 책이다. 요즘 구미가 당기는 책 상당수가 절판도서인 실정.. 마냥 중고로 구입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절판본도 있고, 외국도서도 있고, 비인기도서도 취급하는, 책들의 피난처이자 방공호인 도서관 사랑해...

 

책의 분량은 160 페이지 정도인데, 약 100페이지 동안 에밀 자토펙은 상당히 성공적인 육상 커리어를 구가하게 된다. 이야기에 high나 low가 없는, 상당히 단조로운 정서를 가진 소설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어째서..? 왜 계속 읽은거지?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보았는데, 일단은 체코의 정치적 사건이 지속적으로 묘사되어 함께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에밀 자토펙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성공적인 달리기 인생을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의 조국은 독일군의 침략, 소련의 간섭, 독재정권의 횡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조용하고 순한듯 보이는 에밀의 성품이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고자 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구보씨 처럼...) 섣부른 말을 조심해야 했던 에밀의 심리상태를 공연히 상상해보곤, 소시민인 나는 괜히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다. 

 

에밀 자토펙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작가 장 에슈노즈가 본인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작성했을 소설을 통해, 나의 경험을 빗대 에밀의 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그녀가 소령의 딸이고 그녀의 창이 방금 즐린 경기장에서 경기 개별 기록을 경신했다는 것을 안 에밀은 이것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번개같이 달려가 꽃다발을 사와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며칠 후 그 역시 자신의 기록을 경신해야 할 때에 이번에는 다나가 와서 그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에밀보다 6시간 먼저 태어났을 뿐 두 사람이 똑같이 9월 19일생으로 정확하게 동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우연의 일치에 감탄한 에밀은 이렇게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봐. 에밀이 잠시 후에 이야기했다.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서로 찾아와 축하를 하다 보면 끝이 없을 거 같네. 우리가 앞으로 무수한 기록을 깰 것 같거든. 서로 매번 오가는 일 없이 축하를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함께 사는 게 아니겠어? 그렇지? 네 생각은어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에밀은 한 달 후 그해 런던에 주최권이 돌아간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 Ch 9
그사이에 에밀은 극복해야만 하는 인간, 절대적 기준. 장거리 경기의 표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지치지 않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세계 기록을 함으로써 혹시 심각한 심리적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고 기자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결국 놀라움이 공손한 호기심으로 바뀌고 호기심은 무관심으로 변하는 날, 예외적인 일이 일상이 되면서 그가 더 이상 전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닌 날이 오지 않을지 사람들이 구시렁거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에밀이 졌을 때에만 놀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비록 조만간 그를 왕좌에서 밀어낼 선수가 누구인지 점치기를 좋아했지만 에밀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Ch 14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 입장인 나로 말씀드리자면 이런 업적이나 기록들, 승리와 우승컵 들이 이제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참 잘되었다. 이제부터 에밀이 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Ch 15
그것이 에밀의 마지막 우승이었고,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처음 마음먹은 것처럼 이쯤에서 그냥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그의 신분도 예전 같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에밀은 위마니테 크로스컨트리 경기에 코치로 참가할 뿐이었다. 매일 달리기를 계속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관리를 위한 훈련이었고, 다시 말하면 예전보다는 덜 훈련한다는 뜻이었다. 훈련을 덜 하다 보니 자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볼거리가 부족하지 않은 터였다. 멜버른 경기 이후 10년 동안, 고트발트가 죽고 나자 비록 상표는 바꿔 달았지만 별달리 크게 나아질 것도 없이 당 서기장과 공화국 대통령이 연이어 바뀌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상표가 인민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그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관없었다. 딱히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항상 똑같은 공포, 똑같은 추위였으며 회색빛 풍경과 절망 속에서 기다림의 줄서기와 익명의 투서 등등 모든 것이 변함없이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둡체크란 이름의 새로운 제1서기 장이 튀어나와 조금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둡체크는 새로운 상표, 이번에는
사회 민주주의라는 상표를 원했고 사람들은 얼핏보고는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그는 이 나라는 유럽 개방 정책을 실시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프라하에서 북동쪽으로 2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회주의 맏형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Ch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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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클로디아의 비밀⟫로도 번역되어 들어와 있는 책이다. 

 

꽤 어릴 적 구매했던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바래다 못해 삭아버린 저 표지를 보십시오)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이 어디 이것뿐이랴. 말을 안해서 그렇지 벼르고 있는 책이 많다.

 

주인공은 클로디아라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일상의 무료함과, 장녀로써 감내해야 하는 약간의 불공평함에 지쳐 그녀는 가출을 결심한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싫어서 가출하는 클로디아에게 평범한 계류지란 있을 수 없는 일. 그녀는 동생제이미와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한다. 

 

여기까지는 첫 몇장, 책 소개 문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의외였던 부분은 생각보다 이 가출생활이 꽤 길어졌다는 점이었고, 스토리가 가출생활 그 자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놀라웠던 부분은 이 책이 1967년에 첫 출판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60년대에 쓰인 책이, 2020년대를 살아가는 삼십대 직장인으로 하여금 (초딩이었던) 2000년대를 추억하게 하고 있다. 이런 책을 만나면 참 신기하다. 좋은 책은 타임트래블도 가능하게 하는구나.

 

옛시절 참 좋았는데. 디지털아트가 횡행하기 전이라 가능했던 기괴한 그림체의 삽화도 이제는 향수에 젖게 하는 좋은 땔감일 뿐이다. 책 중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는데, 나중에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도면과도 비교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평을 마친다.

To my lawer, Saxonberg:
(...)

You never knew that I could write this well, did you? Of course, you don't actually know yet, but you soon will. I've spent a lot of time on this file. I listened. I investigated, and I fitted all the pieces together like a jigsaw puzzle. It leaves no doubts. Well, Saxonberg, read and discover.

- 소설 도입부
No one thought it strange that a boy and a girl, each carrying a book bag and an instrument case and who would normally be in school, were visiting a museum. After all, about a thousand school children visit the museum every day. The guard at the entrance merely stopped them and told them to check their cases and book bags. 
- p.32
They were moving Angel. Did Claudia know? They wouldn't have women moving the statue. There would be no one in the ladies room washing up. Who would give her the information? He would. By mental telepathy. He would think a message to Claudia. He folded his hands across his forehead and concentrated. "Stay put, Claudia, stay put. Stay put. Stay put. Claudia, stay put." He thought that Claudia would not approve of the grammar in his mental telegram; she would want him to think stay in place. But he didn't want to weaken his message by varying it one bit. He continued thinking STAY PUT.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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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웅 목사님 책을 찾아본 계기는 아래 바이블 컨퍼런스 영상을 통해서였다. 
 
성경말씀을 2회독 가까이 해오면서도 풀리지 않는 말씀은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어떤 책(특히 레위기)은 피상적인 이해도 허락하지 아니하여서, 눈에만 텍스트를 바르는 수준에 만족하며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지웅 목사님의 바이블 컨퍼런스 영상을 보면서, 갈급함이 모조리 해소되진 않았지만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OMFQNDZCkM&list=PL08iZvKVck79mr47aW2CkXHTET0m9qtXI

성경 말씀에 조금더 가까이 다가갈 실마리를 얻을까 해서 이지웅 목사님 저서를 찾아보았는데, 그나마도 절판된 상태였다. 잠시 실망했지만 거리낌 없이 중고책을 사서 읽었다.
 
책은 유익했다. 내가 몰랐던 역사적&언어적 배경지식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도 유익이 있었으나, 말씀을 읽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성경의 각 책은 지혜서를 제외하고는 원독자(original reader)가 있는데 그 원독자의 시선에서 읽어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화적/역사적 배경을 알고 말씀을 접하라는 빤한 소리처럼 들릴 수는 있으나, 원독자가 누구인지 한번 더 살펴봐야 한다는 점에서 한단계 더 심화된 관점 같기도 하다.
 
일례로,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작성한 각 서신서도 비슷한 시기에 쓰였지만, 원독자가 여러 지역의 교회 교인으로 각기 다르다. 그렇다면 각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시각으로 읽는 것이 적합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성경 배경이 된 역사를 잘 모르는 내가 원독자의 시선에서 성경 말씀을 읽어내려갈 수 있을까..? 큰 도전 앞에 아득함을 느끼게 된다. 일단 중동 역사와 지리 관련 책을 좀더 찾아보기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그 내용과 주제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이 있는데, 바로 로마서와 야고보서입니다. 로마서는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한편,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

(...) 즉, 야고보서의 원독자는 교회 밖의 비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며, 그중에서도 교회에 갓 출석하기 시작한 새신자가 아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교회를 섬겨 온 교회의 리더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 1장. 성경에 다가가는 올바른 태도 : 모든 성경에는 저마다 원독자가 있다

 

이처럼 성경의 모든 책에는 저마다 원독자가 있습니다. 원독자가 특별히 없는 성경은 다섯 권이 있는데, 지혜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지혜서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지혜서는 장소와 시간, 문화와 상관없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 1장. 성경에 다가가는 올바른 태도 : 모든 성경에는 저마다 원독자가 있다

 

즉,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이방인인 데살로니가인이며, 교회의 특징이 유대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이방적일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보면,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합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의 사도권에 도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했던 사람은 대부분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비중이 높았던 교회들은 어김없이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했고, 그러한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에는 언제나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변호가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고, 당시 대부분 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전혀 의심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사도 바울은 굳이 데살로니가전서에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내용을 적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수식어를 전혀 붙이지 않았습니다.

- 2장. 귀납적으로 성경을 바라보다 : 본문 관찰 연습

 

우리는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무언가 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하나님은 우리 의 삶을 인도하실 때, 광야에서 구름 기둥을 멈추셨듯 우리에게도 멈추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멈추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멈추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이 사역을 하지 않으면 이 사역은 지금 큰일 날거야'라거나 '아니야. 쉬면 안 돼. 더 열심히, 더 더 열심히 해야 해'라는 건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심과 헌신 그리고 충성을 요구하실 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멈추면 여러분도 함께 멈추시길 바랍니다. 이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입니다.

- 5장. 우리기 미처 알지 못한 본문의 숨은 의미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무기력증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밀리는 태스크도 생기고..

3년 주기로 약간의 우울감과 무기력증이 찾아온다.
19년도와 22년도는 너무 힘들었고, 일련의 사건들과 감정 소용돌이에 나는 처참히 패배했다.

하지만 살아남았잖아. 지금 오는 슬럼프도 시간이 해결해줄거야. 그리고 그때보다 여러가지 안전장치가 많이 생겼잖나. 책도 읽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말이지.

(실은 독서와 운동이 슬럼프를 예방해줄 줄 알았는데.. 오는 슬럼프를 막을 순 없나 보다.)

이번 슬럼프는 조금 다른 대처를 해보려고 한다. 힘들때마다 말씀을 필사하고 읽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다. 이전 두번의 직장슬럼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오게끔 해보자.

오는 슬럼프를 막을 수 없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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