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빠른 스피드로 완독해서 성취감을 느꼈다.

본인이 처한 현실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여성을 화자로 설정한 점과, 그러한 화자가 여러 남자를 저울질한다는(?) 점에서, 양귀자의 '모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모순'보다 '한국이 싫어서'를 더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분량이 100쪽 가량 차이가 나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이 싫어서'에 담긴 문장이 더 가볍고 부담이 없어서 내달리듯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독자에게 말을 걸려는 시도였다면 가벼운 문체가 적절해 보인다.

영화로도 나온다는데, 서스펜스는 없어 보이던데 어찌 풀어나가련가? 로드무비 장르가 될지.. 궁금하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사육장의 주인을 쫓아내야 한다-는 허희 평론가의 문장은 다소 과격하다고 느꼈다. (허희 평론가님이 그런 사람이라는건 아니지만) 체제 전복을 외치는 사람들은 전복 이후의 대안이 없거나 대안으로 자기자신/자기무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부감이 든다.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 Chapter '1 터틀맨' (p.11-12)

 

W그룹이 경영이 어려워지니까 증권사 직원들한테 할당량을 주고 건실한 거라면서 계열사 회사채랑 어음을 팔게 했어. 그런데 건실은 개뿔. 몇 달 있다가 그 회사들이 부도가 났어. 직원들한테 사기를 치게 한 거지. 완전 양아치 짓거리 아냐?

이게 나한테 왜 쇼킹했냐 하면, 어쩌면 한국에 남아서 계속 종합금융에 다녔더라면 나도 그런 어음을 팔았을 수도 있어서야. W종금 카드 부문이 없어졌거든. 그 외국 카드가 한국에 직접 진출하는 바람에. 그래서 회사 이름도 W증권으 로 바꿨지. 카드 부문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증권 영업으로 갔다고 들었어.

내가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아마…….

- Chapter '1 터틀맨' (p.27-28)

 

예나한테 아이엘츠 공부를 하다 읽은 영어 지문에서 본 이야기를 해 줬어.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 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 알아?"

"어느 게 더 위험한데?"

내 동생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이었지.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휠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당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그런 걸 베이스(BASE) 점프라고 한대. 빌딩(Building)이나 안테나(Antenna), 교각(Span), 절벽(Earth)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다고.

- Chapter '5 베이스 점프' (p.124-125)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애기나 하겠지. 그런 주제에 이 나라는 우리한테 은근히 협박도 많이 했어. 폭탄을 가슴에 품고 북한군 탱크 아래로 들어간 학도병이나, 중동전쟁 나니까 이스라엘로 모인 유대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눈치를 줬지. 그런데 내가 호주 와서 이스라엘 여행자들 만나서 얘기 들어 보니까 얘들도 걸프전 터졌을 때 미국으로 도망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더구먼. 학도병들은 어땠을 거 같아? 다들 울면서 죽었을 걸? 도망칠 수만 있으면 도망쳤을 거다. 뒤에서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러지 못한 거지.

- Chapter '7 남십자성' (p.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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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6장 11절-20절]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순탄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 불리울 만큼 빠삭한 내공을 가지게 되길 바랬지만, 8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계속 모르는 일 새로운 일만 도맡게 되더라.

매년 매월 매주 매일에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묻어있다. 오늘 버티면 내일, 다음달에는 어찌 할지 감도 안 잡히는 나날들..

만나를 다음날까지 쟁여두려 했던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이해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의 만나에 족하라고 하신다. 내일은 내일의 은혜를 바라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계속 주어져서 몸에 힘이 다 빠지고, 할 수 있는거라곤 기도와 말씀읽기 밖에는 별 방법이 없을 때가 많다.

5월에 시흥시 들를 겸 인근 카페를 검색해봤더니 빅트리가 눈에 띄었다. 우드캐빈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상당히 긍정적인 리뷰가 많아서 궁금해졌다. 일단 출발~


카페는 근교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빌딩 한 채 밖에 안 보여서 '대관절 어디에 야외공간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빅트리는 실내공간에 먼저 들어서야 뒷편의 야외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야외의 우드캐빈을 사용하려면 한시간 반에 대해 15,000원을 내야하기 때문에 실내공간에서 먼저 주문을 받는듯 하다.

(참, 여기 화장실은.. 아주 럭셔리하지는 않지만 기본 이상은 한다. 일반적으로 깔끔한 화장실 수준.)


실내공간도 꽤 널찍한 편

페퍼민트 하나 (6천원)에 우드캐빈 한시간 반 사용료 (15천원) 내고 야외공간에 입성했다.

이때 찍지 못했지만.. 우드캐빈 공간 이외에도 야외 테이블이 많아서 우드캐빈 사용료가 아깝게 느껴진다면 테이블에서 쉬어도 되겠더라.

좌우지간 지정된 번호의 우드캐빈으로 이동했다.



5월의 볕 좋은 날씨를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사적인 공간에서 누리니까 좋았다. 원체 굼뜬 성격인지라 한시간 반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다시 올 의향이 있다. 물론 시흥시에 향후 들를 일이 있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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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내가 추천 알고리즘을 막아두어서 더이상 유튜브 피드가 올라오지 않지만(링크), 그러한 설정을 하기 직전에는 유튜브 피드가 북튜버 채널들로 자연스레 채워지고 있었다. 책에 대한 애정이 다시 싹트게 된 까닭이다. 
 
하지만 독서인으로서의 나는.. 추리소설을 탐독하지도 않고, 자기계발서는 약간 경멸할 뿐더러, 그렇다고 다분히 감상적인 소설이랑 딱히 친하지도 않은 아주 어정쩡한 독서취향을 가지고 있는 탓에, 하나의 특정 북튜버 채널이 나의 니즈를 온전히 충족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하다. 최대한 많은 북튜버 채널을 발굴해내는 것은 그래서 꽤 중요한 일이다.
 
지금껏 발굴해두고 몇몇 영상은 재미있게 보았던 북튜버 채널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나중에는 영미권 북튜버 채널도 찾아보려고 하는데 아직은 주파수가 맞는 채널이 없었다.
 

겨울서점

내 유튜브 유랑생활에서 최초로 맞닥뜨린 북튜버. 장르를 딱히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하게 읽으시는 편이고, 나는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여러 철학 서적에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멋있다 생각했다. 친구 신애님도 가끔 출연하시는데, 둘의 티키타카가 또 재미있다. 책 취향이 겹치는 것 같진 않다. 이분이 강추한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나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향은 안 겹쳐도 말솜씨가 좋으셔서 재미있게 듣는 편.

 

 

 

민음사TV

구독하던 북튜버 채널이 겨울서점 뿐이던 시절, 민음사TV 영상이 스멀스멀 피드에 올라와서 이따금 힐끔대며 보다가 영업 완료되었다. 채널영상을 대충 훑어보고 짐작컨대, 민음사TV의 연대기는 1, 2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기는 한국문학팀의 정기현 편집자님과 김화진 편집자님이 출연하시던 말줄임표 코너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후 (아마도 고정적인 출연 멤버를 찾지 못한 것인지) 마케팅부 조아란 (당시) 차장님이 팔을 걷어부치고 문박싱, 갓생살기 코너에 출연하기 시작한 것이 2기의 시작점으로 보여진다.
 
1기나 2기나 소소하고 무해하지만 웃음을 놓치지 않는 컨텐츠들이 많아서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다. 특히 세계문학전집 월드컵에서 해외문학팀 박혜진 편집자님과 김민경 편집자님의 세문전 풀어내기 기술은 단연 압권. 다만, 민음사TV의 기본적인 목적이 자사 책 홍보이기는 하다보니 시류에 편승하는 의견만 내비치는 것 같아 살짝 아쉽다. 

 

 

편집자 K

친구가 추천해서 보게된 북튜버. 문학동네 편집자 강윤정 님이신데, 그래서인지 문학 관련 책들을 많이 추천하신다. 편집자 K님은 감정선을 세세하게 다루고 특히 본인/화자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소설을 즐겨 읽으시는 것 같으나, 이분이 언급하신 책 중에 내가 읽은 책은 '모순' (양귀자 著)과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著) 정도이기 때문에 속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나는 이 채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도서 보다 다른 아이템 (독서대, 리클라이너의자 등)을 영업당하고는 한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북튜버들이 있는데, 시간이 늦어서 다음 포스팅에 또 작성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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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다시피, (주로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리라 예상되는) 여러 사람들이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인생책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다수의 리뷰에서 인생책으로 꼽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꼬집지 않은 까닭 또한 이해가 되었다. 한국 사회가 빚어낸 가족생활과 가족 간의 비교의식을 온전히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적어도 소설의 어느 한두군데 정도는 크게 와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필 주제의식이 가정사에 닿아있는만큼, 명확하게 '좋다 / 싫다' - 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도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을 꺼내기 힘들게 하는 부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가정사 중에 진절머리 나게 싫은 지점이 있을지라도, 나라는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의식하는 한은 가족을 매몰차게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진절머리 나는 가정사를 꺼내봤자 별 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른들 (혹은 청소년들)에게는, 책이 비무장지대가 되어 줄 수 있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고, 그래도 버티는 용기를 얻어가고, 나의 아픔에 공감 받는 이런 모든 과정에서, 남에게 헐뜯김을 당할 위험이란 독서하는 도중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모순'은 K-가족 서사를 다루는 많은 소설 가운데에서도, 두 개의 가정을 다루기 때문에 비교의식에 연연해 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본질적으로 파헤쳤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가 쌍둥이 자매이기 때문에, 이모의 유복한 가정은 어쩌면 화자 '안진진'이 누렸을지도 모를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상상하게 한다. 나였다면 제풀에 지쳐 푸념에 푸념을 거듭했을테지만, 안진진은 구질구질한 집구석을 싸그리 매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행이 인생의 부피를 늘려준다'고 하여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안진진이 선택한 행보는 나를 놀라게 했다. 안진진은 이모 가정과의 비교의식에 패배한 것일까, 아니면 '인생은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안진진은 속이 단단한 친구이니까 이모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진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이 지나고 또 무슨 감상평을 덧댈 수 있을까. 한번 더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이었다.



세 번의 가출 동기가 그토록이나 변변찮았던 것에 비하면 결과는 한없이 의미심장했다. 나의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가출소녀'라는 렌즈를 통과해서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 나중에는 그 일 자체가 바로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나는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세 번씩이나 집을 나간 맹랑한 년…….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입으로 그 사건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 '1. 생의 외침' (p. 11)

외식을 하기로 한 장소는 이모네 수준에 맞게 호텔의 정통 프랑스식당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디로 갈까 많이 망설이다 정한 곳이라는 이모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외식은, 물론 그것마저 일 년에 몇 차례 불과한 일이지만, 망설임 한 번 없이 단호하게 돼지갈비집이었다. 고기 타는 연기가 식당 바깥까지 자욱하고, 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어머니의 자랑처럼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먹는 일도 노동이었다. 쉴 새 없이 고기를 뒤적이고,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볼이 미어지게 싸 넣은 상추쌈으로 격렬한 입 운동이 불가피한 거기. 남동생과 나와 어머니는 전쟁터 속의 병사들처럼 묵묵히,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돼지고기와 싸우다 거의 지쳐서 식당을 나오곤 했었다.
- '2. 거짓말들' (p.31)

(...) 약간의 흠이 있다면 이 모든 선택이 얼마나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지고 있는가를 거듭 강조하는 나영규의 무궁한 활력이었다.

"좋지요? 이 집을 선택한 것은 경치도 경치지만 '그날 오후'라는 찻집 이름이 짱이었어요. 먼 훗날, 진진 씨와 내가 앉아서 그날 오후, 우리가 그곳에서 차를 마셨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 '3. 사람이 있는 풍경' (p.75)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7. 불행의 과장법' (p.152 ~ p.153)
업무 첫날, 나는 내 책상의 반을 차지한 커다란 컴퓨터를 보고 기가 질렸다. 간단한 요령 몇 가지만 익히면 금방 해낼 것이라고 부장은 말했지만 간단치 않은 온갖 서류들을 작성하여 타이핑을 하고 다시 저장하는 복잡한 일들이 모두 내 몫이었다.

내가 취직한 회사는 고급 타일이나 바닥재 혹은 석재들만을 전문적으로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는 건축자재업체였다. 취급하는 종류가 다양하고 종류마다 디자인이나 색상이 제각각 다른 것들인 만큼 입고에서부터 주문현황, 대리점 판매물량, 분기별 입금확인, 재고파악까지가 일일이 각각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업무를 인계해줄 선임자는 이미 떠나고 없어서 누구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빌딩들을 주로 설계하는 건축가 이모부는 이 회사의 주요한 고객이었으므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모부 때문이라도 실력 없는 신입직원으로 찍히는 일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출근 첫날의 점심시간에 당장 회 사 건너편의 컴퓨터학원 새벽반에 등록을 하였다. (...)
- '7. 불행의 과장법' (p.162 ~ p.163)

(...) 나는 이모를 많이 닮았지만 그러나 이모의 딸은 아니었다. 내가 이모의 딸로 태어났다면 나도 주리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인간으로 성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었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12.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p.227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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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내 집중력과 시간을 좀먹고 있던 와중에, 친구가 '피드가 안 뜨게끔 하는' 신기한 설정을 알려주었다.

설정을 적용해보니 유튜브 홈 화면이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실제 유튜브에 버리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으로 추천 피드를 타고 타며 끊임없이 추천영상을 클릭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니, 시청 영상의 범위도 구독채널과 검색한 영상 위주로 축소되고 정신이 정돈된다.

나처럼 유튜브 추천 피드에 많이 흔들리는 분들이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설정내역을 적어본다.


1. 먼저, 내 계정 페이지에 들어가서 '시청 시간' 카테고리에 들어가보자.




2. '시청 시간' 페이지에 들어오게 되면, 통계 그래프 밑에 있는 '시청 기록' 하이퍼링크를 클릭한다.

 

3. 그렇게 들어오면 우측 상단에 점 세개짜리 메뉴버튼을 눌러서, '시청 기록 일시중지'을 선택해 뒤이어 뜨는 팝업창에서 '일시중지'를 클릭한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점 세개 메뉴버튼에서 '시청 기록 지우기' 버튼을 클릭하게 되면,



짜잔 - 이렇게 깔끔한 홈 화면이 나를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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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 기록을 제때 못하고 있는데,,

양귀자의 '모순'을 최근에 완독했다. 사연 있는 사람들은 죄다 공감할 만한 소설이라 생각했다. 왜 여러 사람들이 인생책이라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 이유는, 역시, '인생'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양귀자의 문장은 강하고 단단하고 깊었다. 이런 문장을 쓸 정도의 인생내공과 통찰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벤허'도 다 읽었지만, 이 책들은 과거에 내가 한 챕터씩 리뷰하느라고 아직 1독평을 올리지 못했다. 차라리 1독평을 먼저 올릴까 - 하는 생각이 든다. 포스팅이 차일피일 미뤄지면 이것도 방법이겠다

Hernan Diaz의 Trust는 아직 읽고 있는 중이다. 같은 이야기를 네번씩이나 반복하는 구성인데 어떻게 반전이 있을 수가 있지? 빨리 4부에 가닿고 싶은데 진도가 느려서 조바심만 난다.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도 병렬하여 읽고 있다. 이언 매큐언은 이 책에서 완급조절은 전혀 하지 않고 중요하고 밀도 높은 문장을 앞뒤 간격 없이 빽빽히 배치해두고 있어서, 한페이지를 읽는 도중에도 체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읽는 중. (..) 실은 모든 책을 아주 천천히 읽고 있다. 나라는 인간에게 속독이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 와중에 새로운 책을 업어왔다. 지적허영심은 최대한 빼고, 담백한 현실감각으로 책을 골라오려고 했는데.. 나 잘 골라온 것 맞겠지? 어서 읽고 싶다. 그런데 그 전에 사둔 책들은 또 언제 읽는담..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는 책읽기 만한 것이 없어. 최근 주변인의 퇴사 선언을 연속으로 들었더니 외로운 감정이 더욱더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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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미디어는 사랑과 성욕을 혼동하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 대중가요에서 외치는 '사랑'이라는 말은 '욕망'이라고 바꾸어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가령, 부부의 세계에서 이태오가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외치지만, 그 문장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욕망(욕정)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이다. 수많은 노래 가사는 '우리는 서로 사랑을 했다'고들 하지만, 기실 '우리는 서로 욕망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사랑=성욕'이라고 컨텐츠 크리에이터가 그리 생각했든, 컨텐츠 소비자가 그리 생각했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식은 이제 너나할 것 없이 무의식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사랑과 성욕(욕망,욕정)은 다를 뿐만 아니라 상반된 성질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


고린도전서 13장은 오로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만을 사랑으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숱한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시기질투 및 나를 드높이는 행위가, 정녕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거론하는 '사랑'의 의미에 걸맞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구태여 '사랑'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관계성을 세상에서 찾자면, 개인적으로 그것은 (통상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쏟아주는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관계에서 부모는 (많은 경우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쉽사리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부모가 자식을 생각함과 같이,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연인관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에는 사랑이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사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갈래의 생각을 여기 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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