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먼드 할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클럽의 모토가 뭐였지요?"
"재미, 먹거리, 친구!"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Fun, Food, Friend라고 외쳤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건?"
"친구!"
할머니들이 다시 제창했다.

- Side B Track 07

 
멜버른을 배경으로 한 한국소설이라기에 집어들었다.

얼마 전의 멜버른 여행에서 느꼈던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얼마간 더 연장하고, 첫 여행이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멜버른의 면면을 알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결론은? 초.과.달.성.

재미, 사랑, 감동,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20대의 워홀러 친구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허겁지겁 읽은 뒤, 나는 이 소설이 필히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호주인들이 그 따뜻함을 되받아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후 진정하고...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더 셜리 클럽'은 호주 및 뉴질랜드 등지에 실제로 존재하는 커뮤니티의 이름이다. Shirley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것인데, 소설의 주인공&화자인 설희는 예전부터 자신의 영어이름이 Shirley였다는 이유로 클럽 가입을 희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클럽에 가입하기 위하여 따라들어간 한 스포츠 펍에서 S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S와의 관계가 슴슴하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진감 넘치게 발전하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게 다가 아니다. 여러 갈래의 사건들이 얽혀서 일으키는 폭죽잔치를 지켜보면서, (작품으로는 초면이지만) 박서련 작가님의 옹골찬 스토리텔링 능력을 댓번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형식과 소설적 장치들이 스토리에 걸맞게 사용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중간중간 나오는 카세트테이프 버튼 표식들은, 화자가 카세트플레이어 버튼을 실제로 누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더 셜리 클럽의 존재, 멜버른 및 호주 지리에 대한 박식함, 워킹홀리데이의 절차적 상세사항 등등, 소설에는 박서련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왔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의 디테일과 핍진성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여 찾아봤는데 기사를 보니 역시나, 박서련 작가님도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 기사도 흥미롭게 읽어서, ⟪더 셜리 클럽⟫에 관심이 동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해드린다.

http://www.topdigital.com.au/news/articleView.html?idxno=10746

[인터뷰] 한국인과 호주인의 우정 그리다, ‘더 셜리 클럽’ 박서련 작가 - 호주 톱디지털 뉴스(TO

낯선 땅에서 온갖 몸 고생 맘 고생을 했음에도 호주인들의 인정과 배려에 반하고 멋스럽고 운치 있는 자연에 또 한 번 반한 이방인이라면 소설, ‘더 셜리 클럽’의 주인공이 바로 당신이라고

www.topdigital.com.au

 
 

사실 카세트테이프는 저장 장치로서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요. 저장 장치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것일 텐데, 카세트테이프는 예민하기 짝이 없거든요. 늘어나서 음질이 손상되기 쉽고 엉켜서 못 쓰게 될 수도 있죠. 자기력 에 약해서 자석을 갖다 대면 아주 손쉽게 망가지기도 한대요.

그렇지만 거기 담긴 곡들을 녹음할 때, 엄마에게 3분 14초 짜리 곡을 들려주려고 아빠도 3분 14초를 똑같이 썼을 거예요. 원하는 지점에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거나, 소음이 섞여 들어간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러 번의 3분 14초를 다시 견뎠겠죠. 들려주고 싶은 곡을 고르는 데 드는 시간, 말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같은 걸 빼도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카세트테이프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선물하려 할 때에는 먼저 똑같은, 때로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만 한다는 걸 알려 주는 도구.

내게 그게 필요하다는 걸 당신은 알았던 거예요. 그것도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 Side A Track 05

 

이틀 정도 끙끙 앓다가 마스터에게 아무래도 못 가겠다고 털어놓았다.

"솔직히 셜리는 안 간다고 할 줄 알았어." 마스터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셜리가 조금 겉돌고 있는 거 나도 느꼈거든. 그러니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다른 셰어 메이트들하고 친해졌으면 좋겠 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인데."

생각해 주는 말 같기는 한데 어쩐지 불편했다. 묘한 기시감도 들었다. 아, 그거다. 담임선생님. 나는 내가 왕따인 줄 모르고, 그냥 썩 친한 친구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동안 아이들이 나를 은은하게 따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선생님.

- Side A Track 05

 

쿼카는 전 세계에서도 호주에만, 호주에서도 퍼스 앞바다 로트네스트섬에만 사는 작은 동물이었다. 입 모양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항상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동물이라고 불리는. 로트네스트섬에는 꽤 많이 살고 있지만 역시 희귀 동물이라 직접 만지는 건 불법인데,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에게 자꾸 접근하는 바람에 '웃으며 다가오는 벌금'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비슷한 표현이 나왔던 것 같은데... 아무튼 S가 좋아할 법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Side B Track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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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음에도 스토리를 알고 있는 책들이 더러 있다. ⟪노인과 바다⟫도 그런 경우였는데, (만새기를 천신만고 끝에 잡았는데 상어떼에게 다 털린다는 한 노인의) 스토리가 내게는 단순해보여서 최근까지도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영영 안 읽나 했는데, 친한 지인이 ⟪노인과 바다⟫를 추천하더라. 두께를 보니 분량도 적겠다.. 가벼운 마음을 책을 펼쳤다.

그런데 생각보다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중간중간에 노인의 과거를 궁금케 하는 여러 대목(사별한 아내에 대한 언급, 사자 꿈, 술집에서 벌어진 팔씨름 사건)에서 계속 멈춰서게 되어서인 듯 하다. 책 말미에 실린 해도연 님의 의견처럼, 노인의 어획활동 스토리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그 스토리 밑에 깔려있을 노인의 과거와 가치관, 소년 및 마을사람들과의 관계성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든다. 실제로 물고기(만새기)를 인생 난제로 치환해서 보면 노인에게 저절로 감정이 이입된다. 어부된 자로서 노인은 만새기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 했으며, 그럼에도 빈손으로 돌아왔으며, 그럼에도 유순하게 잠을 청했다.

바다에서의 어획활동이 거칠게 묘사된 탓에 일견 사나워보이기도 하지만, 노인은 최선을 다해 순응하는 인간의 본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부이기에 물고기를 낚았고(직업에 순응), 며칠밤을 새워 어렵게 잡은 물고기를 상어에게 뺏기고 돌아와서도 울분에 차기 보다는 (운명에 순응하듯) 바로 잠을 자고 소년과 안부를 나눈다.

한때는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운명을 철저히 답보하고 따르는 인간에 눈길이 간다.
 
 

"투망을 가져가도 될까요?"
"암, 되고말고."

투망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소년은 노인이 투망을 언제 팔아 치웠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처럼 꾸며 낸 말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노란 쌀밥도 생선도 있을 리 없었고, 소년은 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 16쪽
노인은 바다를 늘 '라 마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물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바다를 비난할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조차 바다를 언제나 여자인 듯 불렀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서 벌어들인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구입하는 부류들은 바다를 '엘 마르', 즉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양 대했다. 그러나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거나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애기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더라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여겼다.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 바다에도 영향을 미치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 29~30쪽
그런데 이놈이 선택한 방법이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략이 미칠 수 없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기겠다는 것이지.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이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한 그곳까지 쫓아가서 네놈을 찾아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닿지 못한 그곳까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함께 있는 것이고, 정오부터 줄곧 이렇게 함께 있었던 거야. 더구나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말이야.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걸 그랬나 보다, 하고 노인은 생각 했다. 그렇지만 어부가 되는 것이 나의 타고난 운명이 아니던가. (...)

- 48쪽
오두막집에 들어선 노인은 돛대를 벽에 기대 놓았다. 어둠 속에서 물병을 찾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담요를 어깨와 등과 다리까지 폭 덮고 두 팔은 쭉 뻗은 채 손바닥을 위로 펼치고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소년이 오두막집 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노인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서 유망어선(流網漁船)은 바다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늦잠을 자고 일어난 뒤, 아침마다 늘 그랬듯이 노인의 오두막집에 찾아와 본 것이었다. 소년은 노인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서 노인의 두 손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피를 가져오려고 조용히 오두막집을 빠져나와서 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내 엉엉 울었다.

-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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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워⟫는 몇 년 전에 사둔 책인데 이제서야 완독했다. 이북리더기가 있어서 어찌저찌 완독할 수 있었다. 이북리더기 만세~

군데군데 오타와 비문이 눈에 띄었지만, 업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던 사람의 통찰력을 이리도 손쉽게 받아먹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전기자동차, 자율주행으로 위시되는 미래의 모빌리티 흐름을 환영하는 입장에서 씌여진 책이다.

테슬라가 어떤 부분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전기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해 업계의 밸류체인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수소연료전지와 전기배터리의 구동방식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특히, 테슬라가 자동차를 거대한 IT기기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동차를 IT기기로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 덕분에 테슬라는 자동차 각 모듈 ECU의 소프트웨어를 통합할 의지가 생겼고, 이것이 협력업체가 납품하는 부품의 가격을 낮추었다. 그 결과 테슬라는 다른 완성차업체보다 많은 수의 센서를 탑재할 수 있었다. (원가경쟁력과 품질이 모두 개선된 상황)

기술의 진보는 어제나 오늘이나 무표정하게 이루어지지만, 옛날의 호기심 어렸던 나와 달리 오늘의 나는 사뭇 두려운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두려워도 알 건 알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읽고 난 다음에도 안도감이 썩 들지는 않지만 말이다.


자동차 회사는 늘 다른 회사들이 어떤 차량을 출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경쟁사의 차가 출시되면 가장 먼저 구매해서 뜯어보고 분해한 다음 분석하는 일을 아주 꼼꼼하게 진행한다. 이것을 ‘벤치마킹’이라고 한다. 특히 벤치마킹만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회사도 여럿 존재한다.

  이렇게 벤치마킹을 하는 과정에서 테슬라 차량의 바디, 섀시, 구성 하드웨어 등 구조도 많이 달랐지만, 6년의 기술 차이라고 말한 주요 이유는 테슬라 차량의 신경망을 구성하는 ‘차량 전자 아키텍처Automotive electronic architecture’에서 많은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컴퓨터가 되어 버린 테슬라'

 

웨이모는 높은 안정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레벨 4, 레벨 5를 위해 가격이 비싸고 처리해야 할 데이터 양도 어마어마한 다채널 라이다Lidar 센서와 고정밀 지도를 필요로 했다면, 테슬라는 출발선과 목표가 달랐기 때문에 그런 무거운 장치들이 필요 없었다. 테슬라는 레벨 2단계의 기술을 장착해 FSD라는 이름으로(후에 유럽 지역에서 이름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물어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과감히 대중에게 판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8,000달러, 1만 달러 이런 식으로 가격을 올렸지만 운전자들은 테슬라의 앞선 FSD 기술에 열광했고, 기꺼이 높은 비용을 지불했다. 그렇게 FSD는 불티나듯 팔렸다.

- '근본부터 다른 구글의 웨이모와 테슬라의 FSD'

 

현재는 인터넷이 활발히 연결되기 전의 상태여서 모니터라고 해봐야 중앙에 있는 HMI 한 개 수준이지만, 유리창에 홀로그램처럼 뿌려지는 HUD 디스플레이나 운전자들을 위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등 마치 지하철이나 버스처럼 승객 공간 좌우에 디스플레이가 가득 들어간 차량이 나올 수도 있다.

누가 그런 것을 원하겠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경제 논리로 해법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좌우의 광고 모니터가 더 많은 장점을 준다거나, 광고를 보는 조건으로 일정 차량 비용을 보조해주거나, 전기 충전비를 감면해준다든지 하는 인센티브를 준다면 이를 적극 환영하는 운전자들이 늘어나고 결국 대세가 될 수도 있다.

- '테슬라가 고평가를 받는 이유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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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자기계발서를 참 많이 읽었다. 이때 읽었던 자기계발서들은 대개 메시지가 뚜렷했다. 나는 인생에 대해서 갈피를 못 잡는 풋내기였기 때문에 단호한 어투로 윽박지르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책에 매력을 느꼈다.

직장생활 n년차인 요즈음은 강한 메시지를 주는 미디어를 최대한 피한다. 그럴만한 여력도 없거니와, 타인의 best practice가 많은 경우 나와는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의 조언대로 하게 될지라도 나 스스로 충분히 생각해볼 여유를 가지고 싶다.

그렇다고 자기계발서가 아예 필요없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길을 잃고 타인의 경험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당장 내 말을 듣는 게 좋을걸?"이라는 말보다 "나는 이렇게 해봤는데 내 성향 탓인지 결과가 괜찮았어"라는 말을 해주는 책(혹은 사람)에 더 이끌리게 되었다뿐.

⟪일하는 마음⟫은 강요하기보다는 반추하고 연구하는 책에 가깝다. 한 친구는 자기계발서라기보단 에세이에 가깝지 않냐고 하던데.. 이 책의 문체는 단단하기는 해도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아서 그런지, 장르가 헷갈릴 정도이다.

첫번째 읽은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이따금씩 펼쳐보게 된다. 그때마다 약간의 위로와 약간의 동력을 선물 받고 간다.

네, 저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더 큰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는 좀 다른데, 두려운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편안하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아직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알지 못하는 일’에 몸을 던지길 좋아하고, 그 일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되어 또 한 뼘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 '프롤로그'

 

2016년 초에 했던 “조심하지 말자”라는 결심은, 이제 시뮬레이션 시간을 조금 단축하고, 하고 싶은 말을 향해, 원하는 길을 향해 직진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준비하고 학습하고 성장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나이가 아니다’라는 자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갈 수 있는 한 멀리 가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다 써보고 싶다. 남김없이, 전부.

그 결심으로부터 2년이 지났다. 확실히 그 시작점에서 멀리 온 것 같다. 나는 더 훨씬 대담해졌고, 크고 작은 일들을 더 많이 벌였으며, 더 거침없이 말하고, 내 의견에 반대할 사람을 줄이기보다는 내 의견에 동의할 사람을 늘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거절하거나 피했을 자리에도 더 많이 나선다(물론 더 하자면 더 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정말 많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 '경계를 넘게 하는 것은'

 

“창업자가 되고 사업체의 대표가 되는 데 충분한 준비 같은 건 없어요. 아무리 준비를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고, 어려운 일투성이일 텐데요. 결국 그 모든 걸 무릅쓸 만큼 충분히 큰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넘어서야 할 어려움의 크기보다 ‘하고 싶은 마음’의 크기가 더 커야만, 그 괴로움을 뚫고 나갈 동력이 생기는 거니까요. 책임을 줄이고 느슨한 형태로 조직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 속도와 밀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해요. 가닿을 수 있는 크기도 당연히 다르겠죠. 적당히 손익분기를 맞추면서 작지만 꾸준히 꾸리는 수준도 괜찮다면, 그렇게 파트너십의 형태로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죠. 그렇지만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빨리, 최대한 크게 가고 싶다면, 책임과 리스크를 피하고도 그럴 방법은 없어요. 둘 다 가질 순 없어요. 그걸 외면하면 안 돼요.”

- '에필로그'

 

그때의 자전거 타기처럼 요즘의 내게도 간절히 잘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다만 문제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없이 넘어져가며 연습할, 사람 없는 공터를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찾을 수 있는 공간은 사람 많은 광장이거나 망가뜨리면 안 될 것 같은 무대뿐인 것 같다. 넘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혼자 벌떡 일어나기만 하면 되었던, 그런 공터는 더 이상 없다.

허락된 공터가 없다면, 광장이나 무대에서라도 연습을 해야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잘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이, 남편의 말대로, 다행인 것이다. 공터에서든 광장에서든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똑같이 신이 날 테고, 그러니 그렇게 거듭 연습해볼 밖에.

- '공터가 없으면 광장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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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빠른 스피드로 완독해서 성취감을 느꼈다.

본인이 처한 현실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여성을 화자로 설정한 점과, 그러한 화자가 여러 남자를 저울질한다는(?) 점에서, 양귀자의 '모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모순'보다 '한국이 싫어서'를 더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분량이 100쪽 가량 차이가 나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이 싫어서'에 담긴 문장이 더 가볍고 부담이 없어서 내달리듯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독자에게 말을 걸려는 시도였다면 가벼운 문체가 적절해 보인다.

영화로도 나온다는데, 서스펜스는 없어 보이던데 어찌 풀어나가련가? 로드무비 장르가 될지.. 궁금하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사육장의 주인을 쫓아내야 한다-는 허희 평론가의 문장은 다소 과격하다고 느꼈다. (허희 평론가님이 그런 사람이라는건 아니지만) 체제 전복을 외치는 사람들은 전복 이후의 대안이 없거나 대안으로 자기자신/자기무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부감이 든다.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 Chapter '1 터틀맨' (p.11-12)

 

W그룹이 경영이 어려워지니까 증권사 직원들한테 할당량을 주고 건실한 거라면서 계열사 회사채랑 어음을 팔게 했어. 그런데 건실은 개뿔. 몇 달 있다가 그 회사들이 부도가 났어. 직원들한테 사기를 치게 한 거지. 완전 양아치 짓거리 아냐?

이게 나한테 왜 쇼킹했냐 하면, 어쩌면 한국에 남아서 계속 종합금융에 다녔더라면 나도 그런 어음을 팔았을 수도 있어서야. W종금 카드 부문이 없어졌거든. 그 외국 카드가 한국에 직접 진출하는 바람에. 그래서 회사 이름도 W증권으 로 바꿨지. 카드 부문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증권 영업으로 갔다고 들었어.

내가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아마…….

- Chapter '1 터틀맨' (p.27-28)

 

예나한테 아이엘츠 공부를 하다 읽은 영어 지문에서 본 이야기를 해 줬어.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 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 알아?"

"어느 게 더 위험한데?"

내 동생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이었지.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휠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당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그런 걸 베이스(BASE) 점프라고 한대. 빌딩(Building)이나 안테나(Antenna), 교각(Span), 절벽(Earth)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다고.

- Chapter '5 베이스 점프' (p.124-125)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애기나 하겠지. 그런 주제에 이 나라는 우리한테 은근히 협박도 많이 했어. 폭탄을 가슴에 품고 북한군 탱크 아래로 들어간 학도병이나, 중동전쟁 나니까 이스라엘로 모인 유대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눈치를 줬지. 그런데 내가 호주 와서 이스라엘 여행자들 만나서 얘기 들어 보니까 얘들도 걸프전 터졌을 때 미국으로 도망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더구먼. 학도병들은 어땠을 거 같아? 다들 울면서 죽었을 걸? 도망칠 수만 있으면 도망쳤을 거다. 뒤에서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러지 못한 거지.

- Chapter '7 남십자성' (p.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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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다시피, (주로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리라 예상되는) 여러 사람들이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인생책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다수의 리뷰에서 인생책으로 꼽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꼬집지 않은 까닭 또한 이해가 되었다. 한국 사회가 빚어낸 가족생활과 가족 간의 비교의식을 온전히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적어도 소설의 어느 한두군데 정도는 크게 와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필 주제의식이 가정사에 닿아있는만큼, 명확하게 '좋다 / 싫다' - 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도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을 꺼내기 힘들게 하는 부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가정사 중에 진절머리 나게 싫은 지점이 있을지라도, 나라는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의식하는 한은 가족을 매몰차게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진절머리 나는 가정사를 꺼내봤자 별 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른들 (혹은 청소년들)에게는, 책이 비무장지대가 되어 줄 수 있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고, 그래도 버티는 용기를 얻어가고, 나의 아픔에 공감 받는 이런 모든 과정에서, 남에게 헐뜯김을 당할 위험이란 독서하는 도중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모순'은 K-가족 서사를 다루는 많은 소설 가운데에서도, 두 개의 가정을 다루기 때문에 비교의식에 연연해 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본질적으로 파헤쳤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가 쌍둥이 자매이기 때문에, 이모의 유복한 가정은 어쩌면 화자 '안진진'이 누렸을지도 모를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상상하게 한다. 나였다면 제풀에 지쳐 푸념에 푸념을 거듭했을테지만, 안진진은 구질구질한 집구석을 싸그리 매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행이 인생의 부피를 늘려준다'고 하여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안진진이 선택한 행보는 나를 놀라게 했다. 안진진은 이모 가정과의 비교의식에 패배한 것일까, 아니면 '인생은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안진진은 속이 단단한 친구이니까 이모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진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이 지나고 또 무슨 감상평을 덧댈 수 있을까. 한번 더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이었다.



세 번의 가출 동기가 그토록이나 변변찮았던 것에 비하면 결과는 한없이 의미심장했다. 나의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가출소녀'라는 렌즈를 통과해서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 나중에는 그 일 자체가 바로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나는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세 번씩이나 집을 나간 맹랑한 년…….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입으로 그 사건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 '1. 생의 외침' (p. 11)

외식을 하기로 한 장소는 이모네 수준에 맞게 호텔의 정통 프랑스식당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디로 갈까 많이 망설이다 정한 곳이라는 이모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외식은, 물론 그것마저 일 년에 몇 차례 불과한 일이지만, 망설임 한 번 없이 단호하게 돼지갈비집이었다. 고기 타는 연기가 식당 바깥까지 자욱하고, 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어머니의 자랑처럼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먹는 일도 노동이었다. 쉴 새 없이 고기를 뒤적이고,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볼이 미어지게 싸 넣은 상추쌈으로 격렬한 입 운동이 불가피한 거기. 남동생과 나와 어머니는 전쟁터 속의 병사들처럼 묵묵히,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돼지고기와 싸우다 거의 지쳐서 식당을 나오곤 했었다.
- '2. 거짓말들' (p.31)

(...) 약간의 흠이 있다면 이 모든 선택이 얼마나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지고 있는가를 거듭 강조하는 나영규의 무궁한 활력이었다.

"좋지요? 이 집을 선택한 것은 경치도 경치지만 '그날 오후'라는 찻집 이름이 짱이었어요. 먼 훗날, 진진 씨와 내가 앉아서 그날 오후, 우리가 그곳에서 차를 마셨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 '3. 사람이 있는 풍경' (p.75)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7. 불행의 과장법' (p.152 ~ p.153)
업무 첫날, 나는 내 책상의 반을 차지한 커다란 컴퓨터를 보고 기가 질렸다. 간단한 요령 몇 가지만 익히면 금방 해낼 것이라고 부장은 말했지만 간단치 않은 온갖 서류들을 작성하여 타이핑을 하고 다시 저장하는 복잡한 일들이 모두 내 몫이었다.

내가 취직한 회사는 고급 타일이나 바닥재 혹은 석재들만을 전문적으로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는 건축자재업체였다. 취급하는 종류가 다양하고 종류마다 디자인이나 색상이 제각각 다른 것들인 만큼 입고에서부터 주문현황, 대리점 판매물량, 분기별 입금확인, 재고파악까지가 일일이 각각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업무를 인계해줄 선임자는 이미 떠나고 없어서 누구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빌딩들을 주로 설계하는 건축가 이모부는 이 회사의 주요한 고객이었으므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모부 때문이라도 실력 없는 신입직원으로 찍히는 일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출근 첫날의 점심시간에 당장 회 사 건너편의 컴퓨터학원 새벽반에 등록을 하였다. (...)
- '7. 불행의 과장법' (p.162 ~ p.163)

(...) 나는 이모를 많이 닮았지만 그러나 이모의 딸은 아니었다. 내가 이모의 딸로 태어났다면 나도 주리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인간으로 성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었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12.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p.227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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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 기록을 제때 못하고 있는데,,

양귀자의 '모순'을 최근에 완독했다. 사연 있는 사람들은 죄다 공감할 만한 소설이라 생각했다. 왜 여러 사람들이 인생책이라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 이유는, 역시, '인생'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양귀자의 문장은 강하고 단단하고 깊었다. 이런 문장을 쓸 정도의 인생내공과 통찰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벤허'도 다 읽었지만, 이 책들은 과거에 내가 한 챕터씩 리뷰하느라고 아직 1독평을 올리지 못했다. 차라리 1독평을 먼저 올릴까 - 하는 생각이 든다. 포스팅이 차일피일 미뤄지면 이것도 방법이겠다

Hernan Diaz의 Trust는 아직 읽고 있는 중이다. 같은 이야기를 네번씩이나 반복하는 구성인데 어떻게 반전이 있을 수가 있지? 빨리 4부에 가닿고 싶은데 진도가 느려서 조바심만 난다.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도 병렬하여 읽고 있다. 이언 매큐언은 이 책에서 완급조절은 전혀 하지 않고 중요하고 밀도 높은 문장을 앞뒤 간격 없이 빽빽히 배치해두고 있어서, 한페이지를 읽는 도중에도 체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읽는 중. (..) 실은 모든 책을 아주 천천히 읽고 있다. 나라는 인간에게 속독이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 와중에 새로운 책을 업어왔다. 지적허영심은 최대한 빼고, 담백한 현실감각으로 책을 골라오려고 했는데.. 나 잘 골라온 것 맞겠지? 어서 읽고 싶다. 그런데 그 전에 사둔 책들은 또 언제 읽는담..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는 책읽기 만한 것이 없어. 최근 주변인의 퇴사 선언을 연속으로 들었더니 외로운 감정이 더욱더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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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여기저기 들고다니며 읽다보니 많이 헤졌다.

지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갈무리하는지 - 에 대한 주제에 내가 환장하나 보다. 내가 아껴마지 않던 책을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다 : 

  • '지적생활의 즐거움', P.G.해머튼 지음, 김욱 편역;
  • '약한 연결',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 '아무튼, 메모', 정혜윤 지음.

이번에 읽게 된 책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내 환심을 샀다. 그런 사소한 이유로 집어들었지만, '책을 아껴가며 읽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정독하게 된 진실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저자 김지원 님의 통찰력이 담긴 문장들 때문이었다. 문단 째로 옮겨 오고 싶은 부분도 많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김지원 님이 '종이책'이라는 특정매체에 주제의식을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이북리더기를 잘만 사용하고 있는 나로서는 종이책만이 가진 차별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책이 어떤 면에서 열등한 것인지(?) 김지원 님의 생각을 알아내고 싶었다. 

종이책은 내가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지, 어떤 것은 손쉽게 읽고 버려도 될지, 어떤 정보는 읽지 않고 그냥 지근거리에 두어도 될지를 위계적으로 판단해 정리해 둘 수 있게 한다. 오히려 이 때문에 당장은 읽을 필요가 없는 정보에도 적정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사 두고 안 보면 된다.) 어떤 책은 오랜 세월 두고두고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서가에 꽂힌 채 나를 노려보"다가, 결과적으로는 먼 훗날 때가 되었을 때 마침내 "내 인생의 책"이 되기도 한다. 아카다 아키노리는 이처럼 어렵지만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 책을 당장 읽지 않고 일단 서가에 꽂아 두는 것을 '책 재우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이에 반해 전자 텍스트는 북마크를 해 두어도 간혹 링크가 변경되거나 저자의 변덕 혹은 사이트 장애로 인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 Chapter '책은 다양한 읽기 경험을 돕는 도구다' (p.95 ~ p.97)
수력공학 • 원자력 • 수학 • 농업 등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 외국어로 된 서적이 가득 꽂힌 서가를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모르는 세계의 부피를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인터넷상의 읽기에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이 '서가 배회'를 통해 나는 어디에 가면 어디쯤에 어떤 정보가 얼마나 있는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중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에 관한 정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감각이 생기고, 필요한 책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틈날 때마다 굳이 도서관을 찾는 이유다. 아마도 나의 독서 중 20퍼센트는 이처럼 때때로 서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책등을 읽고 내키면 책을 꺼내어 표지를 읽는 '책등 독서'일 것이다.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는 당연히 없다. 이렇게 책등이나 서문을 제외하고 '읽지 않은 책'들의 계보를 확장하다 보면,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원하는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 Chapter '책은 믿을 만한 지식의 지도다' (p.109)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종이책은 지식지도에서 내가 위치하는 좌표계를 알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데 그 차별점이 있다 하겠다. 이러한 종이책의 특장점은 (문헌정보학으로 체계화된)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결부되었을 때 극대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이라면 이북리더기가 한수 접고 들어가야 겠다. 책등읽기라든지 서가배회와 같은 활동은 어려우니 말이다. (그래도 이북리더기 나름의 간편함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북리더기와 종이책이라는 두 매체를 병행할 생각이다.)

김지원 님의 첫 책이라는데, 앞으로의 저작활동이 기다려질 정도로 즐거운 독서경험이었다. 무릎을 탁 치는 문장을 하나하나 다 옮기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책의 거의 대부분을 옮겨야 할 판이므로.. 몇 개 부분만 발췌하고 이만 마치도록 하겠다.

우치다 다쓰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단순히 쉬운(=대중적인) 입문서를 쓰겠다면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예시를 가지고 오는 것은 독자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라며, 상대에게 직접 말 거는 글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독자에게 말을 걸겠다는 마음으로 쓰인 글은 비록 어렵더라도, 왠지 모르게 어떻게 해서든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즉 '중2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써라'라는 것은 결국 '중2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써라'와 다름없다. 정말로 내가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글은 검색을 하고 사전을 찾아서라도 읽게 된다. 단순히 평이한 단어를 쓰고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읽고 싶은 글이 되는 것이 다니다. 반드시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의 글쓰기여야 한다. 

- Chapter '읽는 맛 • 읽을 가치 있는 • 읽을 수 있는 글' (p.42 ~ p.43)
2023년 이후, 생성형 AI시대에 언론계 및 출판계와 AI 업체 간의 갈등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원천 정보에 대한 권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자, 인터넷에 대중없이 섞여 있는 수만은 정보(1차, 2차, 3차, 4차, 5차••••••) 가운데 결국 재생산에 활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정보는 원천에 가까운 정보라는 것을 방증한다. 만약 AI 데이터베이스에 정보라면, 그게 뭐든 무조건 많이 쏟아부으면 된다고 한다면, 굳이 까다로운 샅바까움을 벌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Chapter '책은 원산지가 표시된 정보다' (p.81 ~ p.82)
그래서 본래 간결한 글을 좋아하지만, 서문에 대한 취향은 조금 다르다. 서문만큼은 거창하고 방대하고, 때론 장황하고 갈지자로 휘청이고 제 깜냥보다 욕심이 앞서는 글도 싫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서문에서는 자기 삶에 녹아든 질문 • 헤매는 모습 그리고 그럼에도 위로 어떻게든 1밀리미터라도 뚫고 나가려는 에너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서문이 실린 책에서는 저자의 미시사와 세계사가 아코디온을 접었다 펼쳤다 하듯 교차한다. 익숙하고 뻔한 것 • 향수를 주는 것 • 누구나 안전하게 동의하는 전통에서 저자가 갸우뚱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순간, 서문은 책보다 더 커진다.

- Chapter '책은 서문이 붙어 있는 글이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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