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미술쪽에 조예가 없어서 부쩍 전시회도 가고 미술 관련 도서도 접해보려는 요즘이다. ⟪혼자 있기 좋은 방⟫을 통해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작품을 여럿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추상화가 별로 안 실려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나는 정말 못 말리는 구상화-바라기인가보다.

(추상화는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추상화에 대한 거대담론을 나누는 사람들은 정말 내용을 이해하고 발화하는걸까?'라는 의심도 살짝 가지고 있다.)

여튼 눈이 즐거운 책이었다. 거기에 더해, 역사 배경과 화가에 대한 설명이 초코칩처럼 알알히 박혀있어 상식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알알히 박혀있다는 점이 포인트이다. 주구장창 미술사조만 거론했으면 질려서 중도포기했을거다.)

중간중간에 작가님이 자신의 인생관을 지나치게(?) 설파하는 부분은 아쉬웠지만 작가분과의 취향이 다른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303쪽에 개인적으로 마음이 많이 가는 문구가 있어 옮겨본다. 교실 앞에 서성이던 아이에게 감정이 이입된다. 아무리 뒤늦었어도 다시 들어가서 용서를 구하자.

「학교 문 앞에서」에서는 농번기에 집안일을 돕느라 장기 결석한 후 오랜만에 학교에 나타난 아이가 해진 옷차림으로 문 앞에 서서 교실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힙, 힙, 호레이!」속의 파티는 덴마크 화가 미카엘 안케르 Michael Ancher의 주선으로 이뤄졌는데, 그는 화면의 왼쪽에서부터 여섯 번째에 있는 남성이다. 파티가 끝난 후 크뢰위에르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즐거웠던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좀 더 자세히 스케치하기 위해 이젤과 물감을 챙겨 다시 안케르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었고, 마침 혼잡한 도시 생활을 피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안케르는 그의 예의 없는 행동에 분노했다. 결국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고, 곧 화해하긴 했지만 크뢰위에르는 그후 안케르의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림의 진행을 멈출 수 없었기에 정원 풍경을 찍은 사진을 토대로 작업하며 오랫동안 고군분투했고 그런 연유로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총4년이 걸렸다.

- '일상으로의 초대' (p.172)




 

그가 이토록 교실을 많이 그린 데에는 스승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라친스키의 영향이 크다. 러시아 최고 명문인 모스크바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였던 라친스키는 농민을 대상으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일으킨 계몽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퇴직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지가 있는 스몰렌스크로 낙향하여 아동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타테브 마을에 자선 학교를 세우고 암산을 위한 독특한 교육방법을 개발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 학생 중 한 명이 보그다노프벨스키였다. 가난한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나 학교에 다닐 처지가 못 되었던 그에게 라친스키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후원도 해주며 따뜻한 손길을 건넷다. 또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었다.

- '아이의 마음으로 살기'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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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충만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전시를 보고 왔다. 서촌 그라운드시소에서 준비한 '워너 브롱크호스트: 온 세상이 캔버스'가 그것. 
 
인스타그램 광고로 이 전시를 알게 되었는데, 인스타 광고를 통해 그럴듯한 구매를 하기는 처음이라 상당히 얼떨떨하다. 

작품명 Rothcourt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작품은 Rothcourt. 진녹색의 배경에 로저 페더러와 노박 조코비치가 그려져 있다니.. 2019년 윔블던 결승전 장면일까. 굵은 아크릴물감으로 테니스코트가 단순하게 추상화되어 있지만 인물은 매우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워너 브롱크호스트의 작품들은 대부분 '배경은 추상화, 그 안의 인물+동물+사물들은 정밀화'라는 구도를 지녀, 그 대조가 주는 재미가 있었다.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신나게 액티비티를 즐기는듯 해서 그 흥분감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 너만의 활동을 하며 충분히 기쁨을 느낄 수 있어! - 라는 메시지를 받은것마냥. 
 

 
비비드한 색감만 추구하는 줄 알았는데, 워너 브롱크호스트는 진회색이나 검은색도 간간히 사용하더라. 근데 개인적으로는 아크릴물감으로 그려낸 진회색 작품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래 사진처럼 목탄화로 표현해낸 무채색이 더 마음에 들었다.

 
보는 재미가 쏠쏠한 전시 그 잡채. 아래는 'Players'라는 작품인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유명한 축구선수가 그려져 있다. 축알못인 나도 몇명을 구분해 냈다.

작품명 Players
살라
메시
음바페
홀란드

 
직접 가서 보시면 감동이 배가 된다~ 멀리서 보면 쨍한 색감의 아크릴물감 덩어리에 홀리고 작품을 코앞에 두면 인물 디테일에 정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옆에서 보면 툭 튀어나온 아크릴물감의 입체감에 또한번 매료~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옆에서 보는 재미가 있단 말입니다요~

 
그건 그렇고 이 라커사물함.. 작품인줄 모르고 문을 열어보다가 직원분께 주의를 받았다. (뻘줌;;)
라커사물함엔 가족사진이 걸려 있는데, 호주여행에서 느꼈던 호주인들의 가족중심적인 가치관이 이 전시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워너 브롱크호스트의 making film(?)을 전시장 여러군데에서 틀어주고 있었는데 아기를 안고 작품을 그리고 만드는 장면이 계속 보였다. "일이 나의 가정을 훼손할 수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혹시 티켓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고 생각하셨나요? 
아마도 당신의 지갑은 전시 마지막에 자리잡은 굿즈샵에서 집중적으로 털릴 것입니다. 굿즈 퀄리티에 울고 여의치 않은 지갑 사정에 한번 더 울었다. 하지만 피크닉 매트를 고른 나의 안목 칭찬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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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정도서가 있는 모임이 아니고, 각자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자유롭게 나누는 자리였는데, 여기서 참여자 한 분이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을 소개해주셨다.

앨런 튜링이 단명하지 않고 과학적 성취를 지속하였다면,
인공지능과 로봇이 1980년대를 살아가는 한 영국인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

 

대체역사물(alternate history)이구나. 소재를 듣자마자 나는 흥미가 일었지만 막상 소개해주신 분은 손사래를 쳤다. 생각의 흐름 기법이 과중한 나머지, 이론과 과학개념이 난무하여 자기는 읽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AI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꽤나 재미없었던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도 완독한 마당에 뭔들 못 읽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2024.04.08 - [Books] - (읽는 中 - 1장)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챗GPT 수록 개정판)>, 박상길 지음 / 정진호 그림

 

어찌되었건 그런 마음에 이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고,

비록 초반 스타트가 다소 더뎠지만,

주인공의 연인인 미란다의 수상한 과거와 인조인간 아담의 예측불가능한 행동에 페이지를 바쁘게 넘기게 되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인공지능에 관해 내가 한번이라도 접했던 기술적/사회적/문화적 논의가 모두 이 한권의 소설에 응축되어 있다는 데서 감탄했다. 이언 매큐언은 말만 많이 들었지 이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뛰어난 스토리텔러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소설은 얼마나 더 재미있게 잘 썼기에 '⟪나 같은 기계들⟫이 매큐언 기존 작품 대비 별로'라는 리뷰가 있었던 걸까. ⟪속죄⟫나 ⟪암스테르담⟫을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

 

그것은 희망이 허락된 종교적 열망, 과학의 성배였다. 우리의 야망은 높고 낮게 흘렀다 - 창조신화의 실현을 위해서, 기괴한 자기애적 행위를 향해서. 그것이 실현 가능해지자 우리는 결과야 어떻든 욕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고결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목표는 완벽한 자신을 통해 필멸성에서벗어나 신에게 맞서거나 심지어 신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보다 실용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개선된 형태의 더 현대적인 자신을 고안하여 발명의 기쁨, 지배의 전율을 만끽할 작정이었다.

- Chapter 1 (p.11)
넬슨 기념비 근처 시위에서 쓰레기통과 빈 깡통으로 만든 조잡한 로봇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기조연설자 벤이 연단에서 그걸 가리키며 러다이트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대중에게 선진 기계화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일자리는 더이상 보호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역동적이고 창의적이며 세계화된 경제에서 평생일자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야유와 느린 박수가 터져나왔다. 대중의 다수가 그의 다음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의 유연성은 보장과 결합되어야 한다 - 모두를 위해.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건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자의 복지다. 인프라 투자, 훈련, 고등교육, 보편적 기본소득. 조만간 로봇들이 막대한 경제적 부를 창출해낼 것이다. 그들에게 세금을 매겨야 한다. 노동자는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거나 전멸시키는 기계에 대한 지분을 가져야 한다.

- Chapter 4 (p.178)
그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우리는 그가 쉿쉿거리는 치찰음으로 의미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걸 들었다. 그러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고, 그의 목소리가 먼 단파 라디오방송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미란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솔즈베리에 다녀왔어요. 이 자료 복사본을 경찰에 넘겼으니 연락이 올 겁니다. 난 후회는 없어요. 우리의 생각이 다른게 유감스러울 뿐이죠. 당신이 명료함을…… 깨끗한 양심의 편안함을 환영할 줄 알았는데…… (...)"

- Chapter 9 (p.416-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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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싼의 해운대블루라인파크

길고 충실한 1독평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서평(?) 작성 속도가 독파 속도보다 느려서, 독후감 써야할 책이 쌓여있다. 긴 서평은 다회독하는 책에 대해서 쓰기로 하고, 1독평은 가급적 30분 이내로 쓰기로 하자.

그리고 예규판례 정리하기도 은밀히 품고 있던 욕심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법률 대중도서 몇권 읽으면 줏대가 서려나.

스스로 설정한 목표치가 과하니 기대치를 낮추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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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데 장장 130여일이 걸렸다. 
 
원서로 읽었던 탓도 있겠지만, 외견상 스토리가 건조하여 쭉쭉 진도를 빼기 힘들었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짜임새가 있고, 줄거리가 느슨한 듯 하면서 흥미진진했다. 1920~30년대 미국 금융사, 예술, 의학의 발전, 비밀스러운 부부의 가정사가 이렇게 곱게 갈려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다니. 작가 에르난 디아즈의 리서치 능력과, 또 알아낸 지식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는 구상력에 존경을 표한다.
 
스포일러가 아닌 것 같아서 말하자면,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파트가 단 하나의 사건 (재벌금융가 부부의 사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서술자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인데,

  • 1부 '채권' ('Bonds')은 한 작가가 해당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
  • 2부 '나의 인생' ('My Life')은 그 소설로 자신이 가십거리가 된 것에 발끈한 남편 (앤드류 베벨)이 작성한 자서전,
  • 3부 '회고록을 기억하며' ('A Memoir, Remembered')는 앤드류 베벨이 자서전을 작성하게끔 보조해준 비서의 이야기,
  • 4부 '선물' ('Futures')은 그 논란의 중심인 앤드루의 부인 (밀드레드 베벨)이 쓴 일기이다.

소설 속의 소설인 탓에 1부의 인물명이 다르다.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걸려 넘어지는 것 같다. 
 
⟪Trust⟫ 는 책을 읽어야 겠다는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워준다. 4부에 언급된 도서 (버지니아 울프의 플러시 포함)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들도 읽고 싶었고, 스위스의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밀드레드를 지켜보면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도 읽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 소설 ⟪Trust⟫를 한번 더 읽고 싶다.
 
국문으로 번역된 ⟪트러스트⟫는 밀리의 서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국문본은 읽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번역된 문장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나간 사람은 결국 이 책의 진가를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Morning brought out a deeper sort of white from the changeless snows capping the peaks the peaks on either side of the valley, which, later, in the midday sun, would become blinding splinters. A pastoral bell echoed across the sky dappled with flocks of small solid clouds, while unseen birds found themselves, yet again, unable to break their bondage to their two or four notes. The air was laced with the scent of water, stone, and the long-dead things that, darkly, were finding their way back to life deep under the dew-soaked dirt. During that unpopu lated hour, the buildings ceased to be objects of artifice and industry to reveal the nature fossilized in them and come forth in their mineral presence. The breeze dissolved in stiller air; the treetops, so green they were black against the blue, stopped swaying. And for a moment, there was no struggle and all was at rest, because time seemed to have ar rived at its destination.

아침이 되자 계곡 양옆의 높다란 봉우리를 덮은 만년설에서 더 깊은 흰색이 우러나왔다. 나중에 오후의 햇빛을 받으면 그 흰빛은 눈이 멀 듯 길쭉한 가시가 될 터였다. 작고 단단한 구름떼로 얼룩진 하늘에는 목장의 종소리가 울려퍼졌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새들은 이번에도 겨우 두 가지 혹은 네 가지 음밖에 내지 못하는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기에는 물과 돌, 오래전에 죽어 이슬에 젖은 흙 속 깊은 곳에서 다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들의 향이 깃들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그 시간에 건물들은 더이상 기술과 산업의 대상이 아니게 되어 그 안의 화석화된 자연을 드러내고 광물로서의 존재감을 띤 채 앞으로 나섰다. 산들바람이 비교적 고요한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너무 푸르러서 하늘의 파란색을 배경으로 검게 보이는 숲의 꼭대기도 흔들리기를 멈추었다. 잠시 아무것도 몸부림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결국 목적지에 이른 것만 같았다. 

- 'Bonds'의 chapter 4
The mass production of the automobile created a phenomenal cir- cle of prosperity, in which consumption and employment fueled each other. A number of adjacent industries, from oil refineries to rubber factories, flourished around the motor car. Millions of miles of roads were paved. Fleets of trucks expedited commerce. At the beginning of the century there were some 8,000 cars registered in the United States By 1929 that figure had risen to almost 30,000,000.

자동차 대량생산은 놀랄 만한 번영의 원을 만들어냈는데, 그 안에서 소비와 고용이 서로의 연료가 되었다. 정유에서 고무 제조에 이르는 수많은 연관 산업이 자동차를 중심으로 번영했다. 수백만 킬로미터의 도로가 포장되었다. 트럭 부대가 상업을 촉진시켰다. 그 세기가 시작할 때는 미국에 등록된 자동차가 8,000대를 좀 넘었다. 1929년에는 그 숫자가 거의 30,000,000으로 불어났다. 

- 'My Life'의 chapter 'A Destiny Realized'
It is not unlikely that I am still bound to confidentiality by that I ed agreement. This particular document has not come up in my archival research into Bevel's papers so far. The estate's counsel has told me that the law firm held on retainer back then no longer exists. And this is as far as I intend to take the matter.

내게 지금까지도 그 계약에 의한 비밀 엄수의 의무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껏 내가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본 베벨의 서류에서는 그 특정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저택의 자문 변호사는 당시에 의뢰를 맡았던 법무법인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정도 선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 'A Memoir, Remembered'의 chapter II-2
I'm Adam, Eve. Mad, am I?
D F# E A / A E F# D

나는 아담이다, 이브. 미쳤나, 내가I’m Adam, Eve. Mad, am I?
D F# E A / A E F# D 

- 'Fu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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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떠한 생각에 꽂혀 있는데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일단 시도해 보겠다.

 

테니스에는 Best efforts rule이라고, 경기에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ITF 2023년 Code of Conduct M항).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규칙은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많이 적용되리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고있는 팀이나 선수가 '어차피 질 텐데 뭐하러 에너지를 낭비하나'라는 생각에 불성실하게 경기에 임하게 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관객은 굉장히 수준 낮은 경기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경기의 박진감이란, 실력이 더 좋은 선수나 팀에게 달려 있기 보다는 실력 (혹은 컨디션)이 떨어져서 경기를 지고 있는 선수나 팀에게 달려 있다. 언더도그가 경기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관람객은 그 경기를 볼 이유가 없다. 

 

보통은 언더도그에게 best efforts rule 준수를 더 요구하곤 하지만,  높은 랭킹의 선수가 태업을 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2018년 Shanghai Masters 1회전에서의 닉 키리오스 (Nick Kyrgios)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는데... 당시 ATP랭킹 38위인 키리오스가 예선전을 겨우 통과한 선수 Bradley Klahn를 상대로 패한 것이다. 여기서 묘한 부분은, (아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Bradley Klahn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키리오스가 좀체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지 않아 일어난 결과였다는 점이다. 


(하긴 키리오스는 소문 나기로 멘탈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마냥 우세한 위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악마의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안한 멘탈 때문에 모든 경기에서 언더도그인 키리오스는 대체...)

 

선수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경기의 관람가치가 매우 떨어지게 되듯이, 인생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명제는.. 높은 확률로 진실일 것이다. 그런데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있는 힘껏 꾹꾹 눌러밟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볼 수 있는걸까?

 

동호회에서 테니스 경기를 할 때, 나만의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치면 보통 포인트를 잃는다. 강한 스트로크와 독특한 앵글로 포인트를 따내려고 하지만 오히려 나의 범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반면, 오히려 살살 칠 때 포인트를 왕왕 따게 된다. 저쪽의 동태를 계속 살피면서 주워넘기다 보면 상대방이 실수해서 포인트를 내주거나, 상대편의 빈틈이 생겨서 그리 강한 샷을 때리지 않아도 손쉽게 포인트를 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살살 쳐야 한다거나 하는 단순한 교훈으로 결론 지으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느낀 점은 내가 내멋대로 그 포인트의 향방을 결정짓기 전에 이미 그 포인트에 내재된 밑그림이 있기 때문에 그 시그널을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이사야서 31장 1절)

 

꾹꾹 눌러쓰고 꾹꾹 눌러밟고 두손 주먹을 꽉 쥐고 양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인생의 왕도라고 생각해왔었다. 그것만이 내 진지함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믿었다. 과거에 나는 내 노력과 고통의 양이 중요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의 나는 노력의 극대화 이전에 이 상황에서 내가 정말로 무엇을 하거나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 에 대한 밑그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안다. 성경 특히 구약말씀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가 많다. 여기서는 노력의 양은 전혀 상관없는듯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노력(애굽으로 내려감, 우상숭배, etc.)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action 혹은 inaction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은 text는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text를 그대로 읽어나가면 되는 reader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다 정해져 있으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는거냐, 우리가 주체성이 있기는 한거냐? - 라는 문제의식이 뒤따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는 책의 text가 pre-defined되어 있으니 독자로서의 주체성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좋은 책을 읽은 독자(reader)는 텍스트가 고정되어 있다며 답답함을 느끼기 보다는 정신적인 고양감에 사로잡힌다. 지혜로운 독자(≒신자)는 그 끝에 충실한 기쁨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기에 텍스트(≒성경말씀, 혹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밑그림)을 성실하게 읽어나간다. 

 

그래서 best efforts rule을 가장 잘 준수하는 방법은, 상황상황마다 깔려 있는 하나님의 밑그림을 헤아리려는 품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력의 극대화는 그 다음 문제이다. (실은 노력도 하나님께서 그 적정량을 정해두셨을거란 생각이 든다.)

 

역시 내가 생각한 바를 다 표현하지 못했다.. 아직 생각이 여물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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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희랍어 시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장르의 문제라고 분명히 해두어야 겠다. 온갖것에 예민해진 나는 지루한 컨텐츠는 참고 보아도, 보디호러는 이제 두눈 뜨고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작품성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묘사를 하는 데 있어 한강은 가히 천재적인 필력을 보여주기 때문. 그녀의 텍스트를 읽다보면 어떠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내게는 썩 유쾌하지 않았던 탓에, 한강의 다른 작품을 선뜻 집어들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실어증에 걸린 수강생 여자의 이야기를 읽기가 힘들었다. 그녀를 괴롭힌 억울한 사건들 (그녀를 물어버린 백구, 이혼과 양육권 패소 등) 안에서 그녀가 겪은 정신 붕괴, 문자가 해체되는 듯한 그 아득함을 함께 체험하는 느낌이라 힘겨웠다. 분량이 많지 않았는데도 읽는 속도가 느렸던 이유이다.
 
이미지가 주는 임팩트는 꽤나 강렬해서, 실제 실어증 환자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인지 진위 여부는 뒷전으로 밀린다. 더군다나 등장인물의 경험에 한정된 개별성을 주장할 경우, 실어증의 진상은 이 소설에서 힘을 잃게 된다. 이미지의 힘은 인정하지만, 아니 오히려, 이미지의 강력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지배적인 컨텐츠가 꺼려진다.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안 주는 것 같아..
 
적어도 희랍어 강사는 밝은 면이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서서히 사그라드는 촛불 같은 존재였다. 수강생 여자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젖은 장작 같은 느낌이었는데, 글쎄, 희랍어 강사의 불씨가 말잃은 여자를 소생시켰을까?
 
별로 궁금하진 않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 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Ch 2 '침묵'

 

(...) 동양에서 온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희랍어는 달랐어.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 수 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 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네가 말한 그런 이유로 나는 플라톤의 전도된 세계에 이끌렸던 걸까. 그보다 먼저,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 Ch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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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서림에서 장 에슈노즈의 책 ⟪달리기⟫를 처음 접했다. 언뜻 보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코의 한 달리기 선수 에밀 자토펙의 육상종목 커리어에 할애한 소설 같아서 흥미가 동했다. (그런데 에밀 자토펙은 실존인물인데, 왜 소설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걸까? 김훈 ⟪칼의 노래⟫와 같이 역사소설로 보는 것일까.)

 

이지웅 목사님의 저서(링크)에 이어, 이 책도 현재로서는 절판된 책이다. 요즘 구미가 당기는 책 상당수가 절판도서인 실정.. 마냥 중고로 구입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절판본도 있고, 외국도서도 있고, 비인기도서도 취급하는, 책들의 피난처이자 방공호인 도서관 사랑해...

 

책의 분량은 160 페이지 정도인데, 약 100페이지 동안 에밀 자토펙은 상당히 성공적인 육상 커리어를 구가하게 된다. 이야기에 high나 low가 없는, 상당히 단조로운 정서를 가진 소설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어째서..? 왜 계속 읽은거지?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보았는데, 일단은 체코의 정치적 사건이 지속적으로 묘사되어 함께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에밀 자토펙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성공적인 달리기 인생을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의 조국은 독일군의 침략, 소련의 간섭, 독재정권의 횡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조용하고 순한듯 보이는 에밀의 성품이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고자 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구보씨 처럼...) 섣부른 말을 조심해야 했던 에밀의 심리상태를 공연히 상상해보곤, 소시민인 나는 괜히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다. 

 

에밀 자토펙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작가 장 에슈노즈가 본인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작성했을 소설을 통해, 나의 경험을 빗대 에밀의 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그녀가 소령의 딸이고 그녀의 창이 방금 즐린 경기장에서 경기 개별 기록을 경신했다는 것을 안 에밀은 이것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번개같이 달려가 꽃다발을 사와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며칠 후 그 역시 자신의 기록을 경신해야 할 때에 이번에는 다나가 와서 그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에밀보다 6시간 먼저 태어났을 뿐 두 사람이 똑같이 9월 19일생으로 정확하게 동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우연의 일치에 감탄한 에밀은 이렇게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봐. 에밀이 잠시 후에 이야기했다.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서로 찾아와 축하를 하다 보면 끝이 없을 거 같네. 우리가 앞으로 무수한 기록을 깰 것 같거든. 서로 매번 오가는 일 없이 축하를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함께 사는 게 아니겠어? 그렇지? 네 생각은어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에밀은 한 달 후 그해 런던에 주최권이 돌아간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 Ch 9
그사이에 에밀은 극복해야만 하는 인간, 절대적 기준. 장거리 경기의 표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지치지 않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세계 기록을 함으로써 혹시 심각한 심리적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고 기자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결국 놀라움이 공손한 호기심으로 바뀌고 호기심은 무관심으로 변하는 날, 예외적인 일이 일상이 되면서 그가 더 이상 전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닌 날이 오지 않을지 사람들이 구시렁거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에밀이 졌을 때에만 놀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비록 조만간 그를 왕좌에서 밀어낼 선수가 누구인지 점치기를 좋아했지만 에밀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Ch 14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 입장인 나로 말씀드리자면 이런 업적이나 기록들, 승리와 우승컵 들이 이제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참 잘되었다. 이제부터 에밀이 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Ch 15
그것이 에밀의 마지막 우승이었고,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처음 마음먹은 것처럼 이쯤에서 그냥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그의 신분도 예전 같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에밀은 위마니테 크로스컨트리 경기에 코치로 참가할 뿐이었다. 매일 달리기를 계속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관리를 위한 훈련이었고, 다시 말하면 예전보다는 덜 훈련한다는 뜻이었다. 훈련을 덜 하다 보니 자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볼거리가 부족하지 않은 터였다. 멜버른 경기 이후 10년 동안, 고트발트가 죽고 나자 비록 상표는 바꿔 달았지만 별달리 크게 나아질 것도 없이 당 서기장과 공화국 대통령이 연이어 바뀌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상표가 인민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그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관없었다. 딱히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항상 똑같은 공포, 똑같은 추위였으며 회색빛 풍경과 절망 속에서 기다림의 줄서기와 익명의 투서 등등 모든 것이 변함없이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둡체크란 이름의 새로운 제1서기 장이 튀어나와 조금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둡체크는 새로운 상표, 이번에는
사회 민주주의라는 상표를 원했고 사람들은 얼핏보고는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그는 이 나라는 유럽 개방 정책을 실시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프라하에서 북동쪽으로 2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회주의 맏형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Ch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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