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먼드 할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클럽의 모토가 뭐였지요?"
"재미, 먹거리, 친구!"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Fun, Food, Friend라고 외쳤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건?"
"친구!"
할머니들이 다시 제창했다.
- Side B Track 07
멜버른을 배경으로 한 한국소설이라기에 집어들었다.
얼마 전의 멜버른 여행에서 느꼈던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얼마간 더 연장하고, 첫 여행이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멜버른의 면면을 알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결론은? 초.과.달.성.
재미, 사랑, 감동,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20대의 워홀러 친구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허겁지겁 읽은 뒤, 나는 이 소설이 필히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호주인들이 그 따뜻함을 되받아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후 진정하고...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더 셜리 클럽'은 호주 및 뉴질랜드 등지에 실제로 존재하는 커뮤니티의 이름이다. Shirley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것인데, 소설의 주인공&화자인 설희는 예전부터 자신의 영어이름이 Shirley였다는 이유로 클럽 가입을 희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클럽에 가입하기 위하여 따라들어간 한 스포츠 펍에서 S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S와의 관계가 슴슴하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진감 넘치게 발전하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게 다가 아니다. 여러 갈래의 사건들이 얽혀서 일으키는 폭죽잔치를 지켜보면서, (작품으로는 초면이지만) 박서련 작가님의 옹골찬 스토리텔링 능력을 댓번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형식과 소설적 장치들이 스토리에 걸맞게 사용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중간중간 나오는 카세트테이프 버튼 표식들은, 화자가 카세트플레이어 버튼을 실제로 누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더 셜리 클럽의 존재, 멜버른 및 호주 지리에 대한 박식함, 워킹홀리데이의 절차적 상세사항 등등, 소설에는 박서련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왔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의 디테일과 핍진성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여 찾아봤는데 기사를 보니 역시나, 박서련 작가님도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 기사도 흥미롭게 읽어서, ⟪더 셜리 클럽⟫에 관심이 동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해드린다.
http://www.topdigital.com.au/news/articleView.html?idxno=10746
사실 카세트테이프는 저장 장치로서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요. 저장 장치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것일 텐데, 카세트테이프는 예민하기 짝이 없거든요. 늘어나서 음질이 손상되기 쉽고 엉켜서 못 쓰게 될 수도 있죠. 자기력 에 약해서 자석을 갖다 대면 아주 손쉽게 망가지기도 한대요.
그렇지만 거기 담긴 곡들을 녹음할 때, 엄마에게 3분 14초 짜리 곡을 들려주려고 아빠도 3분 14초를 똑같이 썼을 거예요. 원하는 지점에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거나, 소음이 섞여 들어간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러 번의 3분 14초를 다시 견뎠겠죠. 들려주고 싶은 곡을 고르는 데 드는 시간, 말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같은 걸 빼도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카세트테이프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선물하려 할 때에는 먼저 똑같은, 때로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만 한다는 걸 알려 주는 도구.
내게 그게 필요하다는 걸 당신은 알았던 거예요. 그것도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 Side A Track 05
이틀 정도 끙끙 앓다가 마스터에게 아무래도 못 가겠다고 털어놓았다.
"솔직히 셜리는 안 간다고 할 줄 알았어." 마스터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셜리가 조금 겉돌고 있는 거 나도 느꼈거든. 그러니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다른 셰어 메이트들하고 친해졌으면 좋겠 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인데."
생각해 주는 말 같기는 한데 어쩐지 불편했다. 묘한 기시감도 들었다. 아, 그거다. 담임선생님. 나는 내가 왕따인 줄 모르고, 그냥 썩 친한 친구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동안 아이들이 나를 은은하게 따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선생님.
- Side A Track 05
쿼카는 전 세계에서도 호주에만, 호주에서도 퍼스 앞바다 로트네스트섬에만 사는 작은 동물이었다. 입 모양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항상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동물이라고 불리는. 로트네스트섬에는 꽤 많이 살고 있지만 역시 희귀 동물이라 직접 만지는 건 불법인데,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에게 자꾸 접근하는 바람에 '웃으며 다가오는 벌금'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비슷한 표현이 나왔던 것 같은데... 아무튼 S가 좋아할 법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Side B Track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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