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음에도 스토리를 알고 있는 책들이 더러 있다. ⟪노인과 바다⟫도 그런 경우였는데, (만새기를 천신만고 끝에 잡았는데 상어떼에게 다 털린다는 한 노인의) 스토리가 내게는 단순해보여서 최근까지도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영영 안 읽나 했는데, 친한 지인이 ⟪노인과 바다⟫를 추천하더라. 두께를 보니 분량도 적겠다.. 가벼운 마음을 책을 펼쳤다.

그런데 생각보다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중간중간에 노인의 과거를 궁금케 하는 여러 대목(사별한 아내에 대한 언급, 사자 꿈, 술집에서 벌어진 팔씨름 사건)에서 계속 멈춰서게 되어서인 듯 하다. 책 말미에 실린 해도연 님의 의견처럼, 노인의 어획활동 스토리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그 스토리 밑에 깔려있을 노인의 과거와 가치관, 소년 및 마을사람들과의 관계성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든다. 실제로 물고기(만새기)를 인생 난제로 치환해서 보면 노인에게 저절로 감정이 이입된다. 어부된 자로서 노인은 만새기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 했으며, 그럼에도 빈손으로 돌아왔으며, 그럼에도 유순하게 잠을 청했다.

바다에서의 어획활동이 거칠게 묘사된 탓에 일견 사나워보이기도 하지만, 노인은 최선을 다해 순응하는 인간의 본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부이기에 물고기를 낚았고(직업에 순응), 며칠밤을 새워 어렵게 잡은 물고기를 상어에게 뺏기고 돌아와서도 울분에 차기 보다는 (운명에 순응하듯) 바로 잠을 자고 소년과 안부를 나눈다.

한때는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운명을 철저히 답보하고 따르는 인간에 눈길이 간다.
 
 

"투망을 가져가도 될까요?"
"암, 되고말고."

투망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소년은 노인이 투망을 언제 팔아 치웠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처럼 꾸며 낸 말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노란 쌀밥도 생선도 있을 리 없었고, 소년은 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 16쪽
노인은 바다를 늘 '라 마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물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바다를 비난할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조차 바다를 언제나 여자인 듯 불렀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서 벌어들인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구입하는 부류들은 바다를 '엘 마르', 즉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양 대했다. 그러나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거나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애기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더라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여겼다.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 바다에도 영향을 미치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 29~30쪽
그런데 이놈이 선택한 방법이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략이 미칠 수 없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기겠다는 것이지.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이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한 그곳까지 쫓아가서 네놈을 찾아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닿지 못한 그곳까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함께 있는 것이고, 정오부터 줄곧 이렇게 함께 있었던 거야. 더구나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말이야.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걸 그랬나 보다, 하고 노인은 생각 했다. 그렇지만 어부가 되는 것이 나의 타고난 운명이 아니던가. (...)

- 48쪽
오두막집에 들어선 노인은 돛대를 벽에 기대 놓았다. 어둠 속에서 물병을 찾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담요를 어깨와 등과 다리까지 폭 덮고 두 팔은 쭉 뻗은 채 손바닥을 위로 펼치고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소년이 오두막집 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노인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서 유망어선(流網漁船)은 바다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늦잠을 자고 일어난 뒤, 아침마다 늘 그랬듯이 노인의 오두막집에 찾아와 본 것이었다. 소년은 노인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서 노인의 두 손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피를 가져오려고 조용히 오두막집을 빠져나와서 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내 엉엉 울었다.

-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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