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테니스공에 본인 힘의 100% 이상을 실으면 안 되고 오히려 힘을 빼야 한다는 포스팅을 쓴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일터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되는 듯 하다. 업무에 내가 오늘 쏟아부을 수 있는 총량을 다 투입할 것이 아니라, 그 중 20%~30%는 남겨두어 본인에게 되먹여야 한다. 그게 휴식이 되었든 재투자(자기계발)이 되었든 말이다.

물론 100%를 쏟아붓지 말라는 이야기이지, 직장동료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일 이상적인 상황은 일터에서 60%~70%만 쏟아부었는데 회사에서 내게 기대하는 수준의 100%를 넘기는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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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새로운 신원으로 로마를 누빌 수 있게 된 벤허는, 이스라엘과 허 가문 복수를 위해서라면 로마의 정치적 몰락만이 답이라 생각하여 군사 훈련 등을 통해 개인 기량을 다듬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와중에 벤허는 아버지의 대리인이었다던 상인 '시모니데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가지만, 자신이 허 가문의 아들임을 밝힐 객관적인 증거를 내밀지 못해 결국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시모니데스의 집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시모니데스는 벤허를 보고 허 가문의 아들임을 직감하고 하인 말루크를 보내 벤허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는데...

제4부에서는 앞으로의 벤허 여정을 조력자로서든 적대자로서든 함께 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시모니데스, 일데림, 발타사르, 말루크, 에스더, 이라스 그리고 메살라까지.. 또한 4부는, 벤허가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를 발타사르로부터 전해듣게 되면서, 내실 다지기에 집중했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행동 개시에 나서기로 결심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루 월리스는 이번에도 친절하게 '벤허가 내실을 다지는' 다소 지루한 구간을 건너 뛰었다.)

4부를 읽으면서 믿음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벤허는 그 당시 유대인 기준으로 믿음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타사르의 구세주 이야기('정복자 왕이 아닌 영혼의 구원자로 오실 메시아')에 납득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고정관념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바라보면 안 되는데,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아니하기가 참 어렵다.

"(...) 분개한 총독이 말 그대로 집안을 통째로 쓸어버렸죠. 한 명도 남기지 않고요. 저택을 봉쇄해서 지금은 비둘기 소굴이 되었고, 땅도 몰수했지요. 허 가문 소유로 밝혀진 재산은 모두 몰수했어요. 총독이 상처에 황금 연고를 바른 셈이지."
승객들이 웃었다.
"그가 재산을 차지했다는 뜻이군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히브리인이 대답했다.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난 들은 대로 이야기하는 것뿐이니. 한편 이곳 안디옥 지점의 대리인이던 시모니데스는 얼마 후 본인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놀랍도록 빠른 시간에 손꼽히는 거상이 되었습니다. 옛주인이 하던 대로 카라반을 인도에 파견했지요 현재 바다를 누비는 그의 갤리선들은 왕실 함대만큼이나 많고요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엇나가는 법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의 낙타들도 늙어 죽으면 모를까 죽지 않고, 배들은 침몰하지 않지요. 시모니데스가 강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면 황금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네요."
"그렇게 잘 나간 지 얼마나 됐습니까?"
"10년이 채 안 될겁니다."
- 제4부 제1장 (p.247~248)
알고 보니 조각상은 경이로운 미모의 다프네였다. 하지만 벤허는 여신의 얼굴을 힐끗 쳐다볼 짬도 없었다. 조각상 아래에 호피를 깔고서 남녀가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옆에는 일할 때 쓰는 도구들(청년의 도끼와 낫, 아가씨의 바구니)이 시드는 장미더미 위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이런 광경에 벤허는 깜짝 놀라서, 서둘러 향기 나는 잡목 숲으로 되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위대한 숲의 매력은 두려움 없는 평화였고, 그런 점에 반할 뻔했다. 그런데 벌건 대낮에 남녀가 끌어안고 자는 모습에서(다프네의 발 아래서 이렇게 자는 모습에서) 그는 깨달은 것이다. 이 숲의 원칙은 사랑이나, 원칙 없는 사랑이다.
이게 다프네의 달콤한 평화다!
이게 여신을 신봉하는 자들의 종착지다!
이것을 위해 왕후장상들은 재산을 헌납했다!
- 제4부 제6장 (p.294~295)
"(...) 일데림 족장은 로마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원한이 있어요. 3년 전에 파르티아인들이 보스라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로에서 카라반을 급습했습니다. 카라반의 물품에 그 지역에서 걷은 세금이 들어 있었지요. 도적들이 사람들을 다 죽였지만, 로마의 감찰관은 그 세금의 완납만 닦달했습니다. 그러니 세금을 이중으로 내게 생긴 농부들이 황제에게 하소연했고, 황제는 헤롯에게 보상하게 했고, 헤롯은 반역적인 의무 불이행이라면서 일데림의 재산을 몰수했어요. 족장이 황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대답을 했어요. 그래서 노인은 감정이 상해서 앙심을 품었고, 나날이 복수심을 키우고 삽니다."
- 제4부 10장 (p.326)
"그러면 좋겠네요."
에스더가 부드럽게 말을 맺었다.
그 말이 아버지의 관심을 끌었다. 말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에 담긴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주 큰 나무에 아주 작은 새가 앉아도 가장 멀리 있는 잎까지 흔들림이 전해지는 법. 사람들은 때로 아주 사소한 말에도 민감해진다.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느냐, 에스더?"
- 제4부 11장 (p.333)
2천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안다. 신 스스로 진정한 신이요 주인이요 구원임을 증명하는 것 외에 이 혼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없음을. 하지만 당시에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자들조차 오직 로마의 붕괴에서 희망을 찾았다. 로마가 무너지면, 복구되고 재편성되면서 구제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하고 음모를 꾸미고 반란을 일으켜 싸우다가 죽었다. 그렇게 오늘은 피로, 내일은 눈물로 땅을 적셨지만 결과는 매양 똑같았다.
- 제4부 15장 (p.381)

"(...) 구원이 누구에게 있을까? 온 세상에 있소. 구원이 어떻게 올까? 믿음을 굳건히 하시오, 젊은이! 다들 로마가 완전히 무너져야 행복해진다고 믿지. 신을 몰라서가 아니라 통치자들의 실정 때문에 문제들이 생겼다고 말이야. 하지만 난 반대로 생각한다오. (...) 구원이 정치적인 목적이 될 리 만무하오. 통치자와 권력자는 끌어내리면 그 빈자리를 다른 자가 차지하고 위세를 떨칠 뿐이오. 그런 게 구원이라면 신의 지혜가 인간사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 아니겠소. 나도 그대들만큼이나 모르기는 매일반이지만 그래도 말해 보자면, 오실 분은 영혼을 구원하실 게요. 신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그가 여기 머무는 것이 견딜 만해지도록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오."
벤허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드러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제4부 제16장 (p.388~389)

부당함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잘 싸우지만, 영광스러운 결과를 앞에 두면 휠씬 더 잘 싸우기 마련이다. 그에게 상처의 약이 되고, 용맹에 대한 보상이 되고, 죽음의 순간에 추억과 감사가 될 만한 결과가 앞에 있다면.
- 제4부 17장 (p.393)







여러 전자책기기를 전전했다. 아마존 킨들 페이퍼화이트, 크레마 카르타 플러스, 리디페이퍼 3, 이노스페이스원 루나까지.

그런데 아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기기가 없어서 결국 오닉스 북스 노트 에어3 C (Onyx Boox Note Air3 C)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썬!)

  • 특정 플랫폼이나 어플에 구속되지 않을 것 : 킨들이나 리디페이퍼 같은 경우에는 자사 플랫폼만 사용할 수 있어서 컨텐츠 접근성이 제한되었다. 킨들과 리디페이퍼 둘다 하드웨어 사용감은 상위권이었는데, 플랫폼 제한이 너무 아쉬웠음..
  • 터치감이 너무 구리지 않을 것 : 크레마 카르타 플러스나 루나는 플랫폼 종속성이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으나, 터치감이 별로였다. 밑줄도 정확히 쳐지지 않고 페이지 넘김도 엉뚱하게 되는등.. 터치인식오류가 있었다.
  • PDF 자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화면이 클 것 : 논문이나 공공기관 발간자료도 이북리더기로 읽고 싶은데 과거에 사용한 이북리더기들이 다들 쬐깐해서 PDF 읽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에어3 C 모델은 본래 생각지도 못했던 컬러 구현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물론 스마트폰에서 보는 것과 같은 쨍한 색감은 기대할 수는 없지만, 기존 이북리더기를 통해 사진이나 그림이 실린 책을 읽을 때 느꼈던 아쉬움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아쉬웠던 사례#1) (아쉬웠던 사례#2). 에어3 C의 또다른 보너스 기능은,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 블루투스 이어폰을 굳이 연결하지 않아도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그리고... 펜이 딸려와서 필기도 가능하다. PDF 자료에 필기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주 반색할만한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에어3 C가 최고의 이북리더기 - 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현재 내 상황 및 성향을 고려했을 때 내게는 적합한 제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전 이북리더기들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해소하고도 모자라 보너스 요소(컬러, 내장스피커, 필기기능)가 많기 때문이다. 배터리가 비교적 빨리 소모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비슷한 크기의 오닉스 울트라 제품군도 고려했었으나, 카메라와 키보드 탑재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어 오버스펙이라 생각하여 제꼈다. 가격도 무게도 더 올라갈 것이 뻔하다.
 
추가로 구매한 마그네틱 케이스도 무척 마음에 든다. 작은 이북리더기들이 아무리 가볍다지만 눈높이 맞추려고 한 손을 내리 들고 있는 자세가 영 피곤했다. 차라리 책상에 적당한 각도로 세워두고 읽으니 세상 편하다! 

(a) 이 각도는 PDF 자료에 필기할 때 편하고,
(b) 솔직히 이 각도로는 잘 보지 않고 (...)
(c) 이 각도는 무언가 먹으며 읽을 때 정말정말 편하다. 내 최애 각도.

처음에는 c번 각도로 접기가 익숙하지 않아서 고생을 좀 했다. 마그네틱 케이스가 새 제품이면 빳빳해서 더 힘들 수가 있다. 나는 아래 영상과 같이 접고 있다.

아 참, 배터리 소모 문제 말고도 아쉬웠던 점이 한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오닉스가 본질적으로 안드로이드 기기임에도 불구하고) 삼성노트 어플이 깔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오닉스 자체의 문제점이라기 보다는 삼성노트의 폐쇄적인 특성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5.6 타사 PC 지원 중단' 참조) . 어차피 오닉스 기기가 백도어로 기능할 수 있겠다는 노파심에 불필요한 로그인은 자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삼성노트가 깔리지 않는 점은 큰 흠이 되진 않는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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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할 줄 알아야 겠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요즘이다. 최근 물가가 올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주요한 이유는, 먼훗날 언젠가 off-grid로 살고자 하는 희망사항을 가진 인간이라면 필수덕목으로 요리실력을 갖추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아직 복잡한 요리는 하기 싫다. 재료 손질도 귀찮거니와 식후 뒷정리를 생각하면 뒷골이 땡겨오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봉지라면 끓이기도 요리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라면은 어릴 때부터 끓여왔기 때문에 요리의 저변을 넓히려면 다른 메뉴도 시도해봐야 하는데... 하는 찰나, 교회 셀장님이 '파스타도 라면 같이 조리하기 간단하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결심이 섰다. 라면 조리 수준만큼의 평이함을 보장한다니, 당분간은 파스타로 요리(?) 연습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이것도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면..

오늘은 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고기(목살)는 쿠팡이츠로 외부조달해옴. 고기도 구울까 했는데 아직 나는 파스타면 삶는 행위도 버거운 인간이니까.. 자기객관화 하자.

파스타면 삶기가 무엇이 그리 힘드냐고 할 수 있지만, 초보자에게는 이런것도 분절해서 하나하나 알려주는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비의 '팬 하나로 충분한 두 사람 식탁'을 참고하며 파스타면을 삶고 페스토 소스를 뿌려 볶았다. 페스토 소스가 조금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다음에는 덜 넣는 것으로.

실은 몇달 전에 이 책에 나오는 삼겹살카르보나라도 시도해봤는데 주변에서 맛있다고 호응해주어서 매우.. 기뻤다. 하지만 요리초보자인 나에게는 재료가 3가지가 넘어가면 무리임을 깨닫게 되어서.. 당분간 이 요리는 실력이 좋아지면 다시 시도해볼 듯.


팬 하나로 충분한 두 사람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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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근심걱정 없이 편하게 살 수 있을까? 더이상 용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근심걱정거리는 줄어들기는 커녕 더 늘어나기만 할 것 같아.

게다가 나는 무던하지도 않아서 외부적인 요인이 없으면 알아서 걱정거리를 만들어낸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스타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환경을 잠깐이나마 향유하고 싶다.

생각을 잠시 멈추어도 별일이 없는 그런 진공의 시간.

입증해내고, 싸우고, 쟁취해내고, 만들어내는 일을 잠깐 쉬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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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토리 출판사에서 펴낸 벤허를 읽다가, 번역 문제로 5부 초입부터 현대지성 출판사 버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3부까지는 더스토리 버전으로 어떻게든 읽고 있었는데 4부부터 공중제비를 돌고 물구나무를 서도 의아스러운 문장들이 대거 출현하기 시작했다. 가령 아래 사진과 같은 문장들이었는데

'로마의 신민으로 평화로워지자' 문구의 대상이 강인가? 그렇다면 강이 신민이 된다는 표현이 영 어색하다.
괄호 친 부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건지 모르겠다.
태도를 수식하는 문구에 솔직하다는 단어가 두번이나 나올 필요가 있나? 원문에 그렇게 적혀 있었나 궁금해지는 대목.
상아판의 일부는 거의 '닮은' 상태였다..? 그냥 오탈자 교정이 덜 된듯..


아무튼 읽는 도중 턱턱 막히는 느낌에 기분이 영 좋지 않던 와중에, 전자책으로 현대지성 출판사의 버전도 확인해볼 기회가 있었다. 현대지성은 더스토리만큼 각주가 많이 달려있지 않았음에도 가독성이 좋았다. 그만큼 현대지성 출판사 버전이 번역이 더 잘 되었다는 뜻이렸다.

더스토리가 펴낸 '벤허'는 표지와 디자인, 각주 등등 여러 면에서 공을 들였지만 컨텐츠 그 자체를 놓친 것 같아 아쉽다. 번역본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독자가 컨텐츠에 접근할 기회가 차단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번역자와 출판사에 탓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좋은 품질의 번역에 돈으로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한국사회 분위기도 한몫하는 듯. 조금 씁쓸하다. 아니면 원문이 워낙 번역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더스토리 버전의 벤허는 4부까지 읽었으니, 해당 지점까지는 더스토리 기준으로 포스팅을 올리겠다.

세가지 문장(혹은 문단)에 대해서 원문 - 더스토리 - 현대지성 순으로 번역 비교를 하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제4부 제2장

원문

"The river here runs to the west," he said, in the way of general answer. "I remember when it washed the base of the walls; but as Roman subjects we have lived in peace, and, as always happens in such times, trade has had its will; now the whole river front is taken up with wharves and docks. (...)"

더스토리
"이 강은 서쪽으로 흐릅니다. 강물이 성벽에 바로 찰랑대던 때가 기억나는 군요. 하지만 로마의 신민으로 평화로워지자 자연히 무역이 번창했지요. 그래서 이제는 강의 전면에 부두와 선창이 세워졌지요. (...)"

현대지성
"강은 여기서 서쪽으로 흘러간답니다. 강물이 담 기슭에 밀려왔던 때가 생각나네요. 하지만 로마 백성으로 이제껏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왔죠. 그리고 태평성대에 늘 그렇듯 교역이 융성하여 이제는 강가 전체에 부두와 선창이 들어섰죠. (...)"

원문에도 Roman subject로서의 we 라고 주어가 명시되어 있다. 더스토리 버전의 문장은 주어가 누락돼 혼란스럽다.

제4부 제6장

원문

Some there were, no doubt, caught by the promise held out to their troubled spirits of endless peace in a consecrated abode, to the beauty of which, if they had not money, they could contribute their labor; this class implied intellect peculiarly subject to hope and fear; (..)

더스토리
일부는 고통받는 영혼이 성소에서 끝없는 평화를 얻으리라는 약속에 붙들린 것이다. 이들은 신전의 아름다움을 위해 돈으로, 돈이 없으면 노동력으로 봉사했다. 이 부류는 특히 희망과 두려움을 조건으로 지성을 암시한다.

현대지성
지친 영혼들이 성스러운 곳에서 끝없는 평온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에 자로잡혀 돈이 없다면 일을 해서라도 그 아름다움에 기여하려는 이들이 분명 있었다. 이러한 부류는 특히 희망과 두려움을 품기 쉬운 식자층일 확률이 높다.

음.. 이 문장은 현대지성 쪽에서 번역을 잘한것 같다. 원문 문장이 어렵다;;


제4부 제12장

원문

The manner was frank, cordial, winsome. Drusus melted in a moment.

더스토리
솔직하고 쾌활하면서도 솔직한 태도에 드루수스는 곧 마음이 풀렸다.

현대지성
솔직하고 진심이 담긴 메살라의 쾌활한 태도에 드루수스는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금세 풀어져 (...)

원문을 읽어보면 같은 단어가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더스토리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두번 나오는데 번역단계는 그렇다 치고 편집단계에서는 이 문장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건지 의문이긴 하다.




친한 언니가 선물해줘서 이탈로 칼비노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다. 민음사 TV의 정기현 편집자님이 이탈로 칼비노를 자주 언급하기에 궁금하던 차였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답사한 도시들에 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아, 동방견문록의 테마를 차용하고 있다. 다만 이탈로 칼비노의 책은 상상 속의 도시들을 나열하고 있다. 허구의 도시들이기 때문에 관념적&개념적 요소가 많이 부각되고, 패턴을 소개하는 동시에 카오스를 강조하며, 정서적인 디테일이 생략되어 있다. 상상의 나래는 잔뜩 펼치는 동시에 관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탈로 칼비노의 필치가 상당히 건조하다. 그 때문인지 신기한 광경은 잔뜩 마주치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 많이 생각났다. (건조한 모래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꽤 있어 더욱 달리의 작품이 연상되었을 수도..)

화자인 마르코 폴로는 괴이한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고, (얼마 있지도 않은) 이상적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 마르코는 방문한 도시들은 하나의 요소로 환원하고 추상화하고자 하고, 없는 도시는 상상을 통해 존재케 하는 데 몰두하는 상념보이로 보인다. 

한줄평을 하자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기하학 서적과 프로그래밍 서적과 시집이 짬뽕된 느낌을 주었다. 상상 행위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제가 아직 젊었을 때, 어느 날 아침 그곳에 도착했습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바쁘게 걸어갔고 아름다운 치아를 가진 여인들이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어요. 무대 위에서는 병사 세 명이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사방에서 바퀴들이 굴러다녔고 색색깔의 플래카드들이 휘날렸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사막과 대상로밖에 없었지요. 그날 아침 저는 인생에서 제가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이 도로테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제 눈은 다시 광대한 사막과 대상로를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이 그날 아침 도로테아에서 제 앞에 열려 있던 수많은 길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제1부 '도시와 욕망 1'

소설 초반부터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문단을 만나 좌절해 버렸다. 문장 사이사이의 거리감에는 무신경한 채, 연상되는 이미지와 낭독소리,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어야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을 자격이 부여되는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이 시집과도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말하다 보면, 저는 폐하께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 제1부 '도시와 욕망 2'

 

사신들은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인, 콥트인5), 셀주크인들이었다. 황제는 그의 신하들 모두에게 외국인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외국인들의 눈과 귀를 통해서만 제국은 쿠빌라이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사신들은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부터 들은 소식들을 칸에게 보고했는데, 칸은 그 사신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확실치 않은 소리들로 세금 징수원이 걷어 들인 총 액수, 해직당하고 참수당한 관리들의 이름과 성, 가뭄이 들 때면 폭이 좁은 강물에서 물이 흘러드는 수로의 크기 같은 것 들을 말했다.
- 제1부 closing 부분

 

하지만 베네치아의 젊은이가 보고를 할 때는 그와 황제 사이에 전혀 다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동방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언어를 전혀 몰랐던 마르코 폴로는 몸짓과 높이 뛰어오르기, 감탄이나 공포의 비명, 포효하는 동물 울음이나 새소리로, 혹은 여행 가방에서 타조 깃털, 콩알 총, 석영 같은 물건들을 꺼내 자기 앞에 체스 말처럼 늘어놓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부여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 재능 있는 외국인은 즉석 무언극을 보여 주었고 칸은 그것을 해석해야만 했다.
- 제1부 closing 부분

 

숲을 이룬 관들의 끝에는 수도꼭지, 샤워기, 홈통과 배수관이 달려 있습니다. 가지에 매달려 있는 때늦은 과일들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세면대와 욕조나 다른 자기 제품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관공들이 자기 일이 끝나자 벽돌공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떠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 제3부 '섬세한 도시들 3'

이 문단을 읽고 살바도르 달리가 강하게 연상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돌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다리를 묘사한다.

“그런데 다리를 지탱해 주는 돌은 어떤 것인가?”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다리는 어떤 한 개의 돌이 아니라 그 돌들이 만들어 내는 아치의 선에 의해 지탱됩니다.”

마르코가 대답한다.

쿠빌라이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이렇게 묻는다.

“왜 내게 돌에 대해 말하는 건가? 내게 중요한 건 아치뿐이지 않은가?”

폴로가 대답한다.

“돌이 없으면 아치도 없습니다.”

- 제5부 closing 부분

 

 (...) 그러나 트로이에 대해 말하면서 마르코 폴로는 트로이를 콘스탄티노플처럼 이야기했고 마호메트가 여러 달 동안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게 되리라는 예상을 했다. 마호메트가 오디세우스같이 영리한 사람이라면 한밤의 어둠을 이용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골든 혼에 이르는 급류를 타고 페라와 갈라타를 돌아 노를 젓게 할 거라고 했다.

그와 같이 뒤섞여 버린 두 도시에서 제3의 도시가 탄생했는데 이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불릴 것이었으며, 금문 해협과 만 위에 길고 가벼운 다리가 놓일 수도 있고 가파른 길마다 전차가 올라갈 수 있으며, 태평양의 중심 도시로 꽃필 수도 있었다. 천 년 뒤, 황인종과 흑인종과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살아남은 백인종의 자식들이 칸의 제국보다 더 광대한 제국에서 융화될 수 있는 시간인, 삼백 년 간의 긴 집중 공략 시기가 끝난 후에 말이다.
- 제9부 opening 부분

실존하는 도시들이 나와 잠시 기뻤으나, 그마저도 뒤섞어버리는 마르코 폴로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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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일은 항상 많다. 하나하나 다 응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면, 사람의 생사가 오고갈 정도로 응급한 일은 없다.

옛날의 나는 일이 끝나고 한숨 돌리면 운동을 하고 책을 읽어야지 -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끝나지 않고 높은 이율로 복리 계산이 된 마냥 나를 덮쳐왔다.

 옛날에는 내 시간을 전적으로 투자해야만 업무 퀄리티가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물론 업무에 전념해야 하는 시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놓고 보면 업무결과물에는 내 시간만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경험과 지식, 성향이 다 들어간다.

다소 과격한 결론이지만, 좋은 사람은 통상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만들게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절대적인 투입시간만을 퀄리티 결정요인으로 보지 않고, 나의 순발력과 판단력, 지식, 감 등의 요소들도 종합적으로 반영된다고 여기는 편이 좋다.

일찍 자되 좋은 퀄리티로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수 밖에 없다. 후배들한테 항상 야근하고 늦게 자는 생활양식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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