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새로운 신원으로 로마를 누빌 수 있게 된 벤허는, 이스라엘과 허 가문 복수를 위해서라면 로마의 정치적 몰락만이 답이라 생각하여 군사 훈련 등을 통해 개인 기량을 다듬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와중에 벤허는 아버지의 대리인이었다던 상인 '시모니데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가지만, 자신이 허 가문의 아들임을 밝힐 객관적인 증거를 내밀지 못해 결국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시모니데스의 집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시모니데스는 벤허를 보고 허 가문의 아들임을 직감하고 하인 말루크를 보내 벤허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는데...
제4부에서는 앞으로의 벤허 여정을 조력자로서든 적대자로서든 함께 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시모니데스, 일데림, 발타사르, 말루크, 에스더, 이라스 그리고 메살라까지.. 또한 4부는, 벤허가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를 발타사르로부터 전해듣게 되면서, 내실 다지기에 집중했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행동 개시에 나서기로 결심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루 월리스는 이번에도 친절하게 '벤허가 내실을 다지는' 다소 지루한 구간을 건너 뛰었다.)
4부를 읽으면서 믿음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벤허는 그 당시 유대인 기준으로 믿음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타사르의 구세주 이야기('정복자 왕이 아닌 영혼의 구원자로 오실 메시아')에 납득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고정관념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바라보면 안 되는데,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아니하기가 참 어렵다.
"(...) 분개한 총독이 말 그대로 집안을 통째로 쓸어버렸죠. 한 명도 남기지 않고요. 저택을 봉쇄해서 지금은 비둘기 소굴이 되었고, 땅도 몰수했지요. 허 가문 소유로 밝혀진 재산은 모두 몰수했어요. 총독이 상처에 황금 연고를 바른 셈이지."
승객들이 웃었다.
"그가 재산을 차지했다는 뜻이군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히브리인이 대답했다.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난 들은 대로 이야기하는 것뿐이니. 한편 이곳 안디옥 지점의 대리인이던 시모니데스는 얼마 후 본인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놀랍도록 빠른 시간에 손꼽히는 거상이 되었습니다. 옛주인이 하던 대로 카라반을 인도에 파견했지요 현재 바다를 누비는 그의 갤리선들은 왕실 함대만큼이나 많고요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엇나가는 법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의 낙타들도 늙어 죽으면 모를까 죽지 않고, 배들은 침몰하지 않지요. 시모니데스가 강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면 황금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네요."
"그렇게 잘 나간 지 얼마나 됐습니까?"
"10년이 채 안 될겁니다."
- 제4부 제1장 (p.247~248)
알고 보니 조각상은 경이로운 미모의 다프네였다. 하지만 벤허는 여신의 얼굴을 힐끗 쳐다볼 짬도 없었다. 조각상 아래에 호피를 깔고서 남녀가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옆에는 일할 때 쓰는 도구들(청년의 도끼와 낫, 아가씨의 바구니)이 시드는 장미더미 위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이런 광경에 벤허는 깜짝 놀라서, 서둘러 향기 나는 잡목 숲으로 되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위대한 숲의 매력은 두려움 없는 평화였고, 그런 점에 반할 뻔했다. 그런데 벌건 대낮에 남녀가 끌어안고 자는 모습에서(다프네의 발 아래서 이렇게 자는 모습에서) 그는 깨달은 것이다. 이 숲의 원칙은 사랑이나, 원칙 없는 사랑이다.
이게 다프네의 달콤한 평화다!
이게 여신을 신봉하는 자들의 종착지다!
이것을 위해 왕후장상들은 재산을 헌납했다!
- 제4부 제6장 (p.294~295)
"(...) 일데림 족장은 로마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원한이 있어요. 3년 전에 파르티아인들이 보스라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로에서 카라반을 급습했습니다. 카라반의 물품에 그 지역에서 걷은 세금이 들어 있었지요. 도적들이 사람들을 다 죽였지만, 로마의 감찰관은 그 세금의 완납만 닦달했습니다. 그러니 세금을 이중으로 내게 생긴 농부들이 황제에게 하소연했고, 황제는 헤롯에게 보상하게 했고, 헤롯은 반역적인 의무 불이행이라면서 일데림의 재산을 몰수했어요. 족장이 황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대답을 했어요. 그래서 노인은 감정이 상해서 앙심을 품었고, 나날이 복수심을 키우고 삽니다."
- 제4부 10장 (p.326)
"그러면 좋겠네요."
에스더가 부드럽게 말을 맺었다.
그 말이 아버지의 관심을 끌었다. 말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에 담긴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주 큰 나무에 아주 작은 새가 앉아도 가장 멀리 있는 잎까지 흔들림이 전해지는 법. 사람들은 때로 아주 사소한 말에도 민감해진다.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느냐, 에스더?"
- 제4부 11장 (p.333)
2천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안다. 신 스스로 진정한 신이요 주인이요 구원임을 증명하는 것 외에 이 혼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없음을. 하지만 당시에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자들조차 오직 로마의 붕괴에서 희망을 찾았다. 로마가 무너지면, 복구되고 재편성되면서 구제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하고 음모를 꾸미고 반란을 일으켜 싸우다가 죽었다. 그렇게 오늘은 피로, 내일은 눈물로 땅을 적셨지만 결과는 매양 똑같았다.
- 제4부 15장 (p.381)
"(...) 구원이 누구에게 있을까? 온 세상에 있소. 구원이 어떻게 올까? 믿음을 굳건히 하시오, 젊은이! 다들 로마가 완전히 무너져야 행복해진다고 믿지. 신을 몰라서가 아니라 통치자들의 실정 때문에 문제들이 생겼다고 말이야. 하지만 난 반대로 생각한다오. (...) 구원이 정치적인 목적이 될 리 만무하오. 통치자와 권력자는 끌어내리면 그 빈자리를 다른 자가 차지하고 위세를 떨칠 뿐이오. 그런 게 구원이라면 신의 지혜가 인간사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 아니겠소. 나도 그대들만큼이나 모르기는 매일반이지만 그래도 말해 보자면, 오실 분은 영혼을 구원하실 게요. 신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그가 여기 머무는 것이 견딜 만해지도록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오."
벤허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드러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제4부 제16장 (p.388~389)
부당함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잘 싸우지만, 영광스러운 결과를 앞에 두면 휠씬 더 잘 싸우기 마련이다. 그에게 상처의 약이 되고, 용맹에 대한 보상이 되고, 죽음의 순간에 추억과 감사가 될 만한 결과가 앞에 있다면.
- 제4부 17장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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