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다시피, (주로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리라 예상되는) 여러 사람들이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인생책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다수의 리뷰에서 인생책으로 꼽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꼬집지 않은 까닭 또한 이해가 되었다. 한국 사회가 빚어낸 가족생활과 가족 간의 비교의식을 온전히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적어도 소설의 어느 한두군데 정도는 크게 와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필 주제의식이 가정사에 닿아있는만큼, 명확하게 '좋다 / 싫다' - 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도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을 꺼내기 힘들게 하는 부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가정사 중에 진절머리 나게 싫은 지점이 있을지라도, 나라는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의식하는 한은 가족을 매몰차게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진절머리 나는 가정사를 꺼내봤자 별 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른들 (혹은 청소년들)에게는, 책이 비무장지대가 되어 줄 수 있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고, 그래도 버티는 용기를 얻어가고, 나의 아픔에 공감 받는 이런 모든 과정에서, 남에게 헐뜯김을 당할 위험이란 독서하는 도중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모순'은 K-가족 서사를 다루는 많은 소설 가운데에서도, 두 개의 가정을 다루기 때문에 비교의식에 연연해 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본질적으로 파헤쳤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가 쌍둥이 자매이기 때문에, 이모의 유복한 가정은 어쩌면 화자 '안진진'이 누렸을지도 모를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상상하게 한다. 나였다면 제풀에 지쳐 푸념에 푸념을 거듭했을테지만, 안진진은 구질구질한 집구석을 싸그리 매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행이 인생의 부피를 늘려준다'고 하여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안진진이 선택한 행보는 나를 놀라게 했다. 안진진은 이모 가정과의 비교의식에 패배한 것일까, 아니면 '인생은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안진진은 속이 단단한 친구이니까 이모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진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이 지나고 또 무슨 감상평을 덧댈 수 있을까. 한번 더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이었다.
세 번의 가출 동기가 그토록이나 변변찮았던 것에 비하면 결과는 한없이 의미심장했다. 나의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가출소녀'라는 렌즈를 통과해서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 나중에는 그 일 자체가 바로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나는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세 번씩이나 집을 나간 맹랑한 년…….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입으로 그 사건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 '1. 생의 외침' (p. 11)
외식을 하기로 한 장소는 이모네 수준에 맞게 호텔의 정통 프랑스식당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디로 갈까 많이 망설이다 정한 곳이라는 이모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외식은, 물론 그것마저 일 년에 몇 차례 불과한 일이지만, 망설임 한 번 없이 단호하게 돼지갈비집이었다. 고기 타는 연기가 식당 바깥까지 자욱하고, 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어머니의 자랑처럼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먹는 일도 노동이었다. 쉴 새 없이 고기를 뒤적이고,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볼이 미어지게 싸 넣은 상추쌈으로 격렬한 입 운동이 불가피한 거기. 남동생과 나와 어머니는 전쟁터 속의 병사들처럼 묵묵히,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돼지고기와 싸우다 거의 지쳐서 식당을 나오곤 했었다.
- '2. 거짓말들' (p.31)
(...) 약간의 흠이 있다면 이 모든 선택이 얼마나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지고 있는가를 거듭 강조하는 나영규의 무궁한 활력이었다.
"좋지요? 이 집을 선택한 것은 경치도 경치지만 '그날 오후'라는 찻집 이름이 짱이었어요. 먼 훗날, 진진 씨와 내가 앉아서 그날 오후, 우리가 그곳에서 차를 마셨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 '3. 사람이 있는 풍경' (p.75)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7. 불행의 과장법' (p.152 ~ p.153)
업무 첫날, 나는 내 책상의 반을 차지한 커다란 컴퓨터를 보고 기가 질렸다. 간단한 요령 몇 가지만 익히면 금방 해낼 것이라고 부장은 말했지만 간단치 않은 온갖 서류들을 작성하여 타이핑을 하고 다시 저장하는 복잡한 일들이 모두 내 몫이었다.
내가 취직한 회사는 고급 타일이나 바닥재 혹은 석재들만을 전문적으로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는 건축자재업체였다. 취급하는 종류가 다양하고 종류마다 디자인이나 색상이 제각각 다른 것들인 만큼 입고에서부터 주문현황, 대리점 판매물량, 분기별 입금확인, 재고파악까지가 일일이 각각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업무를 인계해줄 선임자는 이미 떠나고 없어서 누구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빌딩들을 주로 설계하는 건축가 이모부는 이 회사의 주요한 고객이었으므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모부 때문이라도 실력 없는 신입직원으로 찍히는 일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출근 첫날의 점심시간에 당장 회 사 건너편의 컴퓨터학원 새벽반에 등록을 하였다. (...)
- '7. 불행의 과장법' (p.162 ~ p.163)
(...) 나는 이모를 많이 닮았지만 그러나 이모의 딸은 아니었다. 내가 이모의 딸로 태어났다면 나도 주리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인간으로 성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었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12.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p.227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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