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언니가 선물해줘서 이탈로 칼비노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다. 민음사 TV의 정기현 편집자님이 이탈로 칼비노를 자주 언급하기에 궁금하던 차였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답사한 도시들에 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아, 동방견문록의 테마를 차용하고 있다. 다만 이탈로 칼비노의 책은 상상 속의 도시들을 나열하고 있다. 허구의 도시들이기 때문에 관념적&개념적 요소가 많이 부각되고, 패턴을 소개하는 동시에 카오스를 강조하며, 정서적인 디테일이 생략되어 있다. 상상의 나래는 잔뜩 펼치는 동시에 관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탈로 칼비노의 필치가 상당히 건조하다. 그 때문인지 신기한 광경은 잔뜩 마주치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 많이 생각났다. (건조한 모래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꽤 있어 더욱 달리의 작품이 연상되었을 수도..)

화자인 마르코 폴로는 괴이한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고, (얼마 있지도 않은) 이상적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 마르코는 방문한 도시들은 하나의 요소로 환원하고 추상화하고자 하고, 없는 도시는 상상을 통해 존재케 하는 데 몰두하는 상념보이로 보인다. 

한줄평을 하자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기하학 서적과 프로그래밍 서적과 시집이 짬뽕된 느낌을 주었다. 상상 행위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제가 아직 젊었을 때, 어느 날 아침 그곳에 도착했습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바쁘게 걸어갔고 아름다운 치아를 가진 여인들이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어요. 무대 위에서는 병사 세 명이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사방에서 바퀴들이 굴러다녔고 색색깔의 플래카드들이 휘날렸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사막과 대상로밖에 없었지요. 그날 아침 저는 인생에서 제가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이 도로테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제 눈은 다시 광대한 사막과 대상로를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이 그날 아침 도로테아에서 제 앞에 열려 있던 수많은 길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제1부 '도시와 욕망 1'

소설 초반부터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문단을 만나 좌절해 버렸다. 문장 사이사이의 거리감에는 무신경한 채, 연상되는 이미지와 낭독소리,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어야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을 자격이 부여되는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이 시집과도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말하다 보면, 저는 폐하께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 제1부 '도시와 욕망 2'

 

사신들은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인, 콥트인5), 셀주크인들이었다. 황제는 그의 신하들 모두에게 외국인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외국인들의 눈과 귀를 통해서만 제국은 쿠빌라이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사신들은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부터 들은 소식들을 칸에게 보고했는데, 칸은 그 사신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확실치 않은 소리들로 세금 징수원이 걷어 들인 총 액수, 해직당하고 참수당한 관리들의 이름과 성, 가뭄이 들 때면 폭이 좁은 강물에서 물이 흘러드는 수로의 크기 같은 것 들을 말했다.
- 제1부 closing 부분

 

하지만 베네치아의 젊은이가 보고를 할 때는 그와 황제 사이에 전혀 다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동방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언어를 전혀 몰랐던 마르코 폴로는 몸짓과 높이 뛰어오르기, 감탄이나 공포의 비명, 포효하는 동물 울음이나 새소리로, 혹은 여행 가방에서 타조 깃털, 콩알 총, 석영 같은 물건들을 꺼내 자기 앞에 체스 말처럼 늘어놓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부여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 재능 있는 외국인은 즉석 무언극을 보여 주었고 칸은 그것을 해석해야만 했다.
- 제1부 closing 부분

 

숲을 이룬 관들의 끝에는 수도꼭지, 샤워기, 홈통과 배수관이 달려 있습니다. 가지에 매달려 있는 때늦은 과일들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세면대와 욕조나 다른 자기 제품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관공들이 자기 일이 끝나자 벽돌공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떠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 제3부 '섬세한 도시들 3'

이 문단을 읽고 살바도르 달리가 강하게 연상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돌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다리를 묘사한다.

“그런데 다리를 지탱해 주는 돌은 어떤 것인가?”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다리는 어떤 한 개의 돌이 아니라 그 돌들이 만들어 내는 아치의 선에 의해 지탱됩니다.”

마르코가 대답한다.

쿠빌라이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이렇게 묻는다.

“왜 내게 돌에 대해 말하는 건가? 내게 중요한 건 아치뿐이지 않은가?”

폴로가 대답한다.

“돌이 없으면 아치도 없습니다.”

- 제5부 closing 부분

 

 (...) 그러나 트로이에 대해 말하면서 마르코 폴로는 트로이를 콘스탄티노플처럼 이야기했고 마호메트가 여러 달 동안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게 되리라는 예상을 했다. 마호메트가 오디세우스같이 영리한 사람이라면 한밤의 어둠을 이용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골든 혼에 이르는 급류를 타고 페라와 갈라타를 돌아 노를 젓게 할 거라고 했다.

그와 같이 뒤섞여 버린 두 도시에서 제3의 도시가 탄생했는데 이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불릴 것이었으며, 금문 해협과 만 위에 길고 가벼운 다리가 놓일 수도 있고 가파른 길마다 전차가 올라갈 수 있으며, 태평양의 중심 도시로 꽃필 수도 있었다. 천 년 뒤, 황인종과 흑인종과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살아남은 백인종의 자식들이 칸의 제국보다 더 광대한 제국에서 융화될 수 있는 시간인, 삼백 년 간의 긴 집중 공략 시기가 끝난 후에 말이다.
- 제9부 opening 부분

실존하는 도시들이 나와 잠시 기뻤으나, 그마저도 뒤섞어버리는 마르코 폴로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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