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매여 살다가 이따금 여백이 허락될 때가 있는데,

이런 귀중한 기회는 자주 오지 않으니까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곤 한다.



그래서 미술관 전시 관람이라는 모험을 강행했다. Lawrence Weiner의 개인전을 가게 된 것.



별도의 리서치는 하지 않고 그저 포스터 하나만 보고 가게 된 것인데 맥락을 모른 채 전시를 보려니 죽을맛이었다.



일단 구상화만 소비하던 내게 개념미술이란 분야가 너무 난해했다.

플러스, 미술관에서 제공되는 설명자료는 (개념미술을 이미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작성된 듯 하여) 내 무지함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현장에서 겨우 주워담은 몇마디 설명으로는 Lawrence Weiner는 언어를 재료로 삼아 작품활동을 했다는데, 단어의 조합일 뿐인 작품에 이렇게까지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것에 큰 의구심을 느꼈다.

(그럼 더욱더 허다한 단어의 조합을 창출해내는 소설가나 시인은 왜 Lawrence Weiner 정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이러한 궁금증과 의구심을 소리내어 말하니

한 친구는 "야 그래도 컵슬리브에 이렇게 인쇄되니 얼마나 이쁘니"라고 하고 (오설록 일회용컵 슬리브에 Lawrence Weiner의 작품이 작게 인쇄되어 있었음),

다른 한 친구는 "그래도 1940년대생의 사람이 이런 아이디어를 가졌다니, 시대를 앞서나갔다"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의 작품과 그에 담긴 의미가 다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술작품의 캡션도 오롯이 이해하기 어렵다.

'언어 + 언어가 가리키는 재질 (Language + the materials referred to)'가 재료라는데, '언어가 가리키는 재질'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미술작품이 붙어있는 벽을 가리키는 걸까..



언젠가는 이해될 날이 오겠지? 그때를 위해서 지금의 무지하고 무식한(?) 기록을 남겨둔다.


그래도 미술작품 자체는 예쁘고 사진에 담기 좋았다.






아래는 미술관에서 얻어온 전시회 설명서이다. 아래 내용을 일독하였으나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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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나온 장편소설 '경청'을 집어들게 된 건 순전히 민음사티비 유튜브 채널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팀 박혜진 편집자님이 이 책을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다가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 (아래 영상의 4분대에 나온다)

 

소설을 너무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
말을 해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말을 안 하는 걸 잘하는 영역도 있거든요.
근데 그 (말하지) 못한 걸 너무 잘 썼어...!



방송에서 주어진 대본대로 읽었다가, 사람 하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된 상담사 임해수.

이 이야기는 그러한 해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해수는 자의든 타의든 계속해서 말문이 막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이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소통의 방식이다. 숨은그림찾기. 그녀는 어머니의 말 속에서 어머니가 하지 않는 말을 찾아내고, 어머니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없는 말을 찾는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에 깃든 말들을 짐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길임을 두 사람은 이제 잘 안다.
(115쪽)
태주는 몸을 일으키고 먼저 자리를 뜬다.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고, 인사 한마디 없이, 벌을 주듯 그녀를 그곳에 남겨 두고 가게를 나가 버린다.
(221쪽)

이 일로 해수 씨도 타격을 입었겠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해명도 하고 싶겠죠. 자기 입장, 자기 처지, 사람들이 말하려는 건 결국 그런 거잖아요. 난 그런 거, 반성이라고 생각 안 해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반성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여자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모두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침묵보다 하찮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그 말들이 철저히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결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기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자신과 마주 앉은 저 여자가 그런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녀는 언어로 이해하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아프게 깨닫는다.

(245쪽~246쪽)


두문불출하던 해수의 단조로운 일상에 두 캐릭터가 난입하게 되는데, 바로 길고양이 순무와 초등학생 세이이다.

순무와 세이도 내몰린 존재들이지만, 해수에게 좀체 마음을 온전히 내주려고 하지 않는다.

박혜진 편집자님 말이 맞다. 이 책은 못다한 말을 독자가 헤아리게끔 하는 데서 그 힘을 발휘한다.

소설 속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이다. 차마 표현하지 못한 세이의 마음을 해수가 헤아려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해수의 논란을 세이가 알고도 모른 척 해준다.



못 다 한 말, 차마 하지 못한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비록 본심이 서툴게 표현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말하고 표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러한 곤조는 과거 경험에서 비롯되는데, 할말을 하지 못해서 억울한 일을 겪게 되거나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일이 허다했기 때문.

그런데 이 책은 입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을 비춰주고 있다. 그리고 입을 닫아버렸음에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혼과 마음이 통하기도 하나봐,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한편, LLM이니 뭐니 하며 언어 모델링이 각광받는 현 시대에, 문장도 하나의 데이터가 될 수 있다면.

말을 아끼는 행위는 이 세상에 데이터(흔적)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데이터를 기록하지 않는다.

<랩걸>의 호프 자런이 인공배양을 진행하던 중 예외적인 형태를 띠는 배아를 접하던 순간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었다. 갑자기 이 문단이 연상되네.

I should write down that this one is different, but I don’t. I used to note any oddities religiously, but I do it less and less as the years go by. It feels too much like a confidence that I haven’t been given permission to share. The first green tissues of a radish seedling are two perfectly heart-shaped, symmetric leaves. In twenty years of growing hundreds of these plants, I have seen exactly two deviants, each with a perfect third leaf—a baffling green triad where there should be only a pair. I think of those two plants often, and they even enter my dreams occasionally, causing me to wonder why I was meant to see them. Being paid to wonder seems like a heavy responsibility at times.

이 표본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기록해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조금만 예외적인 것도 종교적으로 기록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일을 점점 더 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과 그것을 공유하기에는 그것이 나에게만 허락된 비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무 싹의 첫 초록색 조직은 대칭을 이루며 완벽한 하트모양을 한 두 개의 이파리다. 20년 동안 이 식물을 수백 개 길렀지만 예외는 단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두 번 다 완벽하게 생긴 세 번째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다. 2인조만 있어야 하는 곳에 당황스럽게도 3총사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 두 무를 자주 떠올리곤 한다. 심지어 가끔 꿈에까지 나타나서 내가 그것들을 목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든다. 무엇에 대해 궁금해하는 직업을 가진 것이 어떨 때는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Chapter 10 of 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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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0 - [도서] - [1독] Lab Girl (Hope Jahren 著)


친구가 동네맛집이라며 데려다 주었다.

알바를 따로 쓰는 것 같지는 않고 사장님(혹은 적어도 사장님과 가족관계로 보이는 분)이 오셔서 주문을 받아주시는데 그 친절을 사자성어로 표현하자면 겉.바.속.촉.  

과잉친절이 없어서 부담없었고,
별 말씀 안 드렸는데도 눈치코치로 물티슈 등 필요를 빠르게 채워주셨다.



동네맛집에 머무르기 아깝다 느낄 정도로 맛이 좋았다. 회사 근처의 콘타이가 채워주지 못한 갈증을 마포의 음식점이 채워주는구나.

처음에는 으레 먹던 똠얌 쌀국수를 먹으려했는데, 신메뉴로 나온 볶음밥(똠얌소스가 들어간 해물문어덮밥..)을 모험 삼아 시도해봤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렷다! 신메뉴는 성공했습니다!! 정확한 메뉴명이 기억나지 않아 애석하다.

또 마포 공덕동에 가게된다면 팟타이로얄 재방문 해야겠다.


주소는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173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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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J에서 팬톤에 대해 유익한 영상을 내주어서 나 자신도 학습할 겸 여기에 일부를 번역, 윤문 및 기록해둔다.



팬톤의 유니크함은 품질의 균일함에서 온다.

똑같은 컬러로 도색하더라도 색깔이 입혀지는 대상의 재질에 따라 빛깔이 다르게 나타날 위험이 있는데, 팬톤은 이를 해결한 것.

화학을 전공했던 Lawrence Herbert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팬톤은 작은 인쇄업체에 불과했다 .

그 당시에는 패키징 컬러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아서 같은 브랜드 포장지도 인쇄업체마다 색이 조금씩 달랐다.

예를 들면  같은 코닥 필름라도 패키징 업체에 따라 노란색이 미묘하게 다르게 나오곤 했는데, 더 어두운 색의 포장지는 상품이 오래되었다는 인식에 덜 팔릴 수 밖에 없었다.

Lawrence Herbert는 이 부분에 집중했고, 1962년에 그는 팬톤을 인수한다.



팬톤은 팬톤만의 자체적인 컬러시스템 IP를 보유하고 있다.

팬톤의 노하우는, 어떤 재질에서든 같은 색깔로 보이게끔 하는 균질성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똑같은 버건디 색깔이 카드보드지에서든 빤딱빤딱한 잡지책에서든 똑같은 빛깔을 내려면 재질별로 염료 배합을 달리 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

팬톤은 만개가 넘는 색깔에 대해 테스트를 진행하여 이를 자체적인 컬러 가이드북에 집대성해두었다.

팬톤 매출의 절반 가량은 이러한 컬러 가이드북(실물)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색깔을 담은 가이드북이 다종으로 매년 출시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공기에 노출되면 색이 바래기 때문에 재구매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꾸준히 판매량이 발생한다.


다른 절반의 매출은 라이선싱, 컨설팅, 디지털 서비스에서 나온다.

가령, 유니버셜스튜디오의 경우, 미니언즈 시리즈를 위해 팬톤에게 새로운 노란색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가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minion yellow이다.

Herbert 家는 2007년에 X-Rite에게 1억8천만달러에 팬톤을 매각하게 된다. 2012년에는 X-Rite가 생명과학 기업인 Danaher Corporation에게 인수되게 되고, 2023년에는 팬톤과 X-Rite를 비롯한 여러 법인들이 분사하여 Veralto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상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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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4개월간의 긴 분투 끝에 Lab Girl을 완독했다.


예전에 동아리 선배에게서 한국어 책을 받았었는데 이제사 펼치게 되었다.
책장에 처박혀 있는 랩걸을 보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을 수년간 해왔다. 저 표지를 봐라. 세밀화가 아름다워서 책을 펼치지 않을 수가 없다.
(표지 그림을 보고 감탄해서 신혜우 님을 인터넷에 검색해봤을 정도이다.)


랩걸을 마음에 계속 두게 된 것은 표지 탓이 크지만,
랩걸을 펼칠 마음을 먹게 한 것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가끔 방문하곤 하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멋있고 신비로워 보였는데, 그분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으니 호기심을 랩걸 독파로 해소하고자 한 것.
의사 선생님이 typical한 의사 보다는 과학자 스러운 면모가 돋보여서 랩걸을 읽으면 의사 선생님의 일면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읽고 나니까 호프 자런과 이 의사 선생님은 성격이 정반대이더라...

원서로 읽어보고 싶은 욕구에 영어책을 따로 구매했는데, 생각보다 문장이 어려워서 수개월간 진땀을 흘렸다.
어렵사리 이해하게 된 문장은 아름답고 의미 있었으며, 인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호프 자런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My papers do not display the footnotes that they have earned, the table of data that required painstaking months to redo when a graduate student quit, sneering on her way out that she didn’t want a life like mine.

논문들은 하나하나 훈장처럼 획득한 주석들도, 대학원생이 나처럼 살지 않겠다고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일을 그만둔 후 몇 달에 걸쳐 고생고생하며 다시 만든 데이터도 내보이지 않는다.

(Chapter 1 of Part 1)
Establishing yourself as a scientist takes an awfully long time. The riskiest part is learning what a true scientist is and then taking the first shaky steps down that path, which will become a road, which will become a highway, which will maybe someday lead you home. A true scientist doesn’t perform prescribed experiments; she develops her own and thus generates wholly new knowledge. This transition between doing what you’re told and telling yourself what to do generally occurs midway through a dissertation. In many ways, it is the most difficult and terrifying thing that a student can do, and being unable or unwilling to do it is much of what weeds people out of Ph.D. programs.

과학자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진정한 과학자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불안한 첫걸음을 떼서 오솔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오솔길은 도로가 되고, 그 도로는 고속도로가 되고, 그 고속도로는 언젠가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진정한 과학자는 이미 정해진 실험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실험을 개발하고, 그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낸다. 지시받은 일을 하는 단계와 스스로 무엇을 할지 정하는 단계 사이의 이행은 일반적으로 논문을 쓰는 중간 시점 정도에 일어난다. 여러 면에서 그것은 학생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할 의사가 없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박사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다.

(Chapter 8 of Part 1)
Plants are not the only exploding growth in the American South. Between the years 1990 and 2000, the amount of total income tax collected annually by the state of Georgia more than doubled as Coca- Cola, AT& T, Delta Air Lines, CNN, UPS, and thousands of other recognizable companies relocated themselves to the Atlanta area. Some of this new revenue was channeled into the universities in order to meet the educational needs of a larger and more corporate population. Academic buildings popped up like mushrooms, the number of faculty skyrocketed, and student enrollment continued to climb. In Atlanta during the 1990s, every kind of growth seemed possible.

미국 남부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식물뿐만이 아니다. 1990년에서 2000년 사이 조지아 주에서 거둬들인 연간 소득세 총액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코카콜라, AT&T, 델타 항공, CNN, UPS를 비롯한 수천 개의 유명 기업들이 애틀랜타 지역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어난 인구가 필요로 하는 교육에 대한 욕구를 맞추기 위해 새로 늘어난 이 수입 중 일부가 대학으로 유입됐다. 대학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교수들 숫자가 치솟았으며, 학교에 등록하는 학생 수도 계속 늘어갔다. 1990년대 애틀랜타에서는 모든 종류의 성장이 가능해 보였다.

(Chapter 1 of Part 2)
I’m good at science because I’m not good at listening. I have been told that I am intelligent, and I have been told that I am simple-minded. I have been told that I am trying to do too much, and I have been told that what I have done amounts to very little. I have been told that I can’t do what I want to do because I am a woman, and I have been told that I have only been allowed to do what I have done because I am a woman. I have been told that I can have eternal life, and I have been told that I will burn myself out into an early death. I have been admonished for being too feminine and I have been distrusted for being too masculine. I have been warned that I am far too sensitive and I have been accused of being heartlessly callous. But I was told all of these things by people who can’t understand the present or see the future any better than I can. Such recurrent pronouncements have forced me to accept that because I am a female scientist, nobody knows what the hell I am, and it has given me the delicious freedom to make it up as I go along. I don’t take advice from my colleagues, and I try not to give it. When I am pressed, I resort to these two sentences: You shouldn’t take this job too seriously. Except for when you should.

나는 남의 말을 듣는 데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잘 한다. 나는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고, 단순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일을 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해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일찍 죽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너무 여성적이라는 꾸지람을 들었는가 하면 너무 남성적이어서 못 믿겠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고, 비정하고 무감각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나만큼이나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내가 여성 과학자이기 때문에 누구도 도대체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내가 무엇인지를 만들어나가면 되는 값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동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충고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음 두 문장을 되뇐다: 이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할 때를 빼고.

(Chapter 14 of Part 3)


한가지 첨언할 것은, 랩걸의 한국어판 번역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 원서를 읽을 때 이해가 안 가면 한국어판을 들춰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김희정 번역가님의 작업에 경탄할 수 밖에 없었다. 원문 문장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을까? 본래 전공도 아닌 분야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 및 리서치를 해야 했을테고 작가와도 이메일을 주고 받아야 했겠지 (뇌피셜). 그리고 한국 독자 입장에서 목넘김이 좋으려면 문장도 잘 다듬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도 고민을 많이 하신 흔적이 보였다. 김희정 번역가님 손을 거쳐간 책을 더 찾아봐야 겠다.

에휴, 초등학생 때는 책을 참 많이 읽었는데 말이지 (문제는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엉뚱한 책을 펼쳐놓고 읽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급우들이 고자질해서 수업시간에 경고도 받고 종종 혼도 났음 ㅋㅋ). 여러 페이지에 걸쳐 끈기 있게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설명하는 매체는 나에게 안성맞춤인 소재인데, 지금은 어쩌다가 이렇게 책을 멀리하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책을 더 바지런히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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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강도가 격렬해지는 이맘때에는 마음이 떠난 사람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조직이나 개인을 개선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면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제갈길을 가는 편도 있음을 안다. 이별이 불가피하다면, 서로 좋은 기억이 남아있을 때 하자.


제때 보고서를 제출할 수는 있을지 의구심이 들 때쯤 성탄절을 맞이하고는 했다. 친한 동료는 12월 초반부터 크리스마스 캐롤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묵묵히 일하곤 했다. 뒤늦게 나도 캐롤 플레이리스트를 듣기 시작했는데, 이 친구는 떠날 준비를 하는 듯 하다.

괜히 생떼 쓰지 말고 안녕을 빌어주자!


결국 성경말씀 대로 될것임을 믿는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로에 확실히 올라탄건지 의심스럽고 매순간이 불안하다.

유혹에 넘어졌을 때는 말할것도 없고
평온한 때에도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걱정이다.

이 길을, 이 행동을, 이 마음을 원치 않으실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러한 지점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지 않았을지 의심도 한다 (그저 합리화를 위한 변명 뿐일 수도 있겠다만).

유년시절에는 이데올로기가 허황된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데올로기, 가치체계, 언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정하고 내편 네편도 가른다.

나는 이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살아남는게 좋은건가?




책은 인간관계와 같아서
평점이 하늘을 찔러도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나에게 한줄기 빛을 선사해주는 책이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읽은 '약한 연결'과 '아무튼, 연결'은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내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이다.
취향과 생각을 함께 나눈 오래된 친구가 보내온 편지와도 같다.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 하다.
'너 계획 세워도 잘 못 지키지? 상황과 여건이 항상 바뀌는데 계획 세워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지?
하지만 그렇게 계획 없이 살다간 인생에 뭐가 남을까 걱정도 되고.. 내가 그런 너를 위해 생각 좀 해봤어'

'약한 연결'은 통제와 조절, 계획으로 위시되는 강한 연결만으로 인생을 채우지 말고, 새로운 활동이나 만남(이를테면 여행)을 주기적으로 추구하여 인생을 환기시키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웃긴 건 이 책이 아홉 챕터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홉 챕터 내내 같은 주장을 변주하여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짜증을 유발할 서술방식이었겠지만 한번 말해서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나에게는 고마운 전개방식이었던 셈.

'아무튼, 메모'는 무작위성이 한층 더 돋보이는 책이었다. 그탓인지 온라인 서점에서도 '메모에 대한 잘 정리된 고찰'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리뷰를 볼 수 있었는데, 반면 나는 정혜윤 작가님의 의식의 흐름과 엇비슷하게 흘러가는 탓에 되려 몰입하여 읽었다. 세상에, 나랑 비슷하게 삼천포에 잘 빠지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이분도 치밀하게 계획된 삶을 살기보다는 순간순간 관조하고 몰입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대신 메모를 통해 순간순간을 매듭 짓고 있다고 느꼈다.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고,
계획을 세우더라도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잘 지키지 못하고,
결국 계획이 무슨 소용인가 허탈해하는 나에게
'약한 연결'과 '아무튼, 메모'는 이러한 해법을 선사했다.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면, 지나간 순간을 잘 갈무리할 것


몇가지 글귀를 옮겨적어보면서 글을 마무리해보도록 하자.





약한 연결 (136-137쪽)

이십대에는 13회의 애니메이션을 한 번에 쉬지 않고 보기, 이틀 밤을 새워가며 게임하기, 한 작가의 책 스무 권은 한 번에 사서 계속 일기가 가능했다. 사실, 비평가의 감성은 이런 '양적인 훈련'으로 축적된다. 특히 하위문화는 그렇다. 하지만 삼십대 중반부터는 힘들어졌다. 아이가 생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아이를 맞이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업무 효율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 시기부터 인생의 자원은 한계가 있고 최첨단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체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기호를 확장해갈 수는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는 '늙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면 광대한 네트워크를 눈앞에 두고도 정보를 수집하는 필터가 막히고, 새로운 검색어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때때로 필터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대신, 휴가 때는 외국에 가는 생활방식을 채택했다. 이 책은 그 결과 태어난 것이다.





아무튼, 메모 (45쪽)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불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아무튼, 메모 (48쪽)
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하다. 이 세상엔 우리의 관심을 원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니까. 우리는 스치듯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미 많이 배웠다. 마치 스마트폰의 기사를 검색하는 손가락의 가벼움처럼. 그러나 무엇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슴 아리게도 '설레는 느낌'도 없이 살게 된다.

아무튼, 메모(41쪽)
"메모같이 사소한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고 싶다. 우리는 항상 사소한 것들의 도움 및 방해를 받고 있지 않냐고. 강아지가 꼬리만 흔들어도 웃을 수 있지 않냐고, 미세먼지만 심해도 우울하지 않냐고, 소음만 심해도 떠나고 싶지 않냐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몇 문장을 옮겨 적고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아무튼, 메모 (161쪽)
메모를 한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메모장 안에서 인내심과 경이로운 순간들, 생각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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