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인간관계와 같아서
평점이 하늘을 찔러도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나에게 한줄기 빛을 선사해주는 책이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읽은 '약한 연결'과 '아무튼, 연결'은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내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이다.
취향과 생각을 함께 나눈 오래된 친구가 보내온 편지와도 같다.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 하다.
'너 계획 세워도 잘 못 지키지? 상황과 여건이 항상 바뀌는데 계획 세워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지?
하지만 그렇게 계획 없이 살다간 인생에 뭐가 남을까 걱정도 되고.. 내가 그런 너를 위해 생각 좀 해봤어'

'약한 연결'은 통제와 조절, 계획으로 위시되는 강한 연결만으로 인생을 채우지 말고, 새로운 활동이나 만남(이를테면 여행)을 주기적으로 추구하여 인생을 환기시키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웃긴 건 이 책이 아홉 챕터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홉 챕터 내내 같은 주장을 변주하여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짜증을 유발할 서술방식이었겠지만 한번 말해서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나에게는 고마운 전개방식이었던 셈.

'아무튼, 메모'는 무작위성이 한층 더 돋보이는 책이었다. 그탓인지 온라인 서점에서도 '메모에 대한 잘 정리된 고찰'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리뷰를 볼 수 있었는데, 반면 나는 정혜윤 작가님의 의식의 흐름과 엇비슷하게 흘러가는 탓에 되려 몰입하여 읽었다. 세상에, 나랑 비슷하게 삼천포에 잘 빠지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이분도 치밀하게 계획된 삶을 살기보다는 순간순간 관조하고 몰입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대신 메모를 통해 순간순간을 매듭 짓고 있다고 느꼈다.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고,
계획을 세우더라도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잘 지키지 못하고,
결국 계획이 무슨 소용인가 허탈해하는 나에게
'약한 연결'과 '아무튼, 메모'는 이러한 해법을 선사했다.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면, 지나간 순간을 잘 갈무리할 것


몇가지 글귀를 옮겨적어보면서 글을 마무리해보도록 하자.





약한 연결 (136-137쪽)

이십대에는 13회의 애니메이션을 한 번에 쉬지 않고 보기, 이틀 밤을 새워가며 게임하기, 한 작가의 책 스무 권은 한 번에 사서 계속 일기가 가능했다. 사실, 비평가의 감성은 이런 '양적인 훈련'으로 축적된다. 특히 하위문화는 그렇다. 하지만 삼십대 중반부터는 힘들어졌다. 아이가 생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아이를 맞이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업무 효율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 시기부터 인생의 자원은 한계가 있고 최첨단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체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기호를 확장해갈 수는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는 '늙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면 광대한 네트워크를 눈앞에 두고도 정보를 수집하는 필터가 막히고, 새로운 검색어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때때로 필터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대신, 휴가 때는 외국에 가는 생활방식을 채택했다. 이 책은 그 결과 태어난 것이다.





아무튼, 메모 (45쪽)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불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아무튼, 메모 (48쪽)
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하다. 이 세상엔 우리의 관심을 원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니까. 우리는 스치듯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미 많이 배웠다. 마치 스마트폰의 기사를 검색하는 손가락의 가벼움처럼. 그러나 무엇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슴 아리게도 '설레는 느낌'도 없이 살게 된다.

아무튼, 메모(41쪽)
"메모같이 사소한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고 싶다. 우리는 항상 사소한 것들의 도움 및 방해를 받고 있지 않냐고. 강아지가 꼬리만 흔들어도 웃을 수 있지 않냐고, 미세먼지만 심해도 우울하지 않냐고, 소음만 심해도 떠나고 싶지 않냐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몇 문장을 옮겨 적고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아무튼, 메모 (161쪽)
메모를 한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메모장 안에서 인내심과 경이로운 순간들, 생각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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