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서림에서 장 에슈노즈의 책 ⟪달리기⟫를 처음 접했다. 언뜻 보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코의 한 달리기 선수 에밀 자토펙의 육상종목 커리어에 할애한 소설 같아서 흥미가 동했다. (그런데 에밀 자토펙은 실존인물인데, 왜 소설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걸까? 김훈 ⟪칼의 노래⟫와 같이 역사소설로 보는 것일까.)

 

이지웅 목사님의 저서(링크)에 이어, 이 책도 현재로서는 절판된 책이다. 요즘 구미가 당기는 책 상당수가 절판도서인 실정.. 마냥 중고로 구입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절판본도 있고, 외국도서도 있고, 비인기도서도 취급하는, 책들의 피난처이자 방공호인 도서관 사랑해...

 

책의 분량은 160 페이지 정도인데, 약 100페이지 동안 에밀 자토펙은 상당히 성공적인 육상 커리어를 구가하게 된다. 이야기에 high나 low가 없는, 상당히 단조로운 정서를 가진 소설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어째서..? 왜 계속 읽은거지?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보았는데, 일단은 체코의 정치적 사건이 지속적으로 묘사되어 함께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에밀 자토펙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성공적인 달리기 인생을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의 조국은 독일군의 침략, 소련의 간섭, 독재정권의 횡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조용하고 순한듯 보이는 에밀의 성품이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고자 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구보씨 처럼...) 섣부른 말을 조심해야 했던 에밀의 심리상태를 공연히 상상해보곤, 소시민인 나는 괜히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다. 

 

에밀 자토펙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작가 장 에슈노즈가 본인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작성했을 소설을 통해, 나의 경험을 빗대 에밀의 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그녀가 소령의 딸이고 그녀의 창이 방금 즐린 경기장에서 경기 개별 기록을 경신했다는 것을 안 에밀은 이것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번개같이 달려가 꽃다발을 사와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며칠 후 그 역시 자신의 기록을 경신해야 할 때에 이번에는 다나가 와서 그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에밀보다 6시간 먼저 태어났을 뿐 두 사람이 똑같이 9월 19일생으로 정확하게 동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우연의 일치에 감탄한 에밀은 이렇게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봐. 에밀이 잠시 후에 이야기했다.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서로 찾아와 축하를 하다 보면 끝이 없을 거 같네. 우리가 앞으로 무수한 기록을 깰 것 같거든. 서로 매번 오가는 일 없이 축하를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함께 사는 게 아니겠어? 그렇지? 네 생각은어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에밀은 한 달 후 그해 런던에 주최권이 돌아간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 Ch 9
그사이에 에밀은 극복해야만 하는 인간, 절대적 기준. 장거리 경기의 표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지치지 않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세계 기록을 함으로써 혹시 심각한 심리적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고 기자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결국 놀라움이 공손한 호기심으로 바뀌고 호기심은 무관심으로 변하는 날, 예외적인 일이 일상이 되면서 그가 더 이상 전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닌 날이 오지 않을지 사람들이 구시렁거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에밀이 졌을 때에만 놀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비록 조만간 그를 왕좌에서 밀어낼 선수가 누구인지 점치기를 좋아했지만 에밀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Ch 14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 입장인 나로 말씀드리자면 이런 업적이나 기록들, 승리와 우승컵 들이 이제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참 잘되었다. 이제부터 에밀이 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Ch 15
그것이 에밀의 마지막 우승이었고,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처음 마음먹은 것처럼 이쯤에서 그냥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그의 신분도 예전 같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에밀은 위마니테 크로스컨트리 경기에 코치로 참가할 뿐이었다. 매일 달리기를 계속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관리를 위한 훈련이었고, 다시 말하면 예전보다는 덜 훈련한다는 뜻이었다. 훈련을 덜 하다 보니 자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볼거리가 부족하지 않은 터였다. 멜버른 경기 이후 10년 동안, 고트발트가 죽고 나자 비록 상표는 바꿔 달았지만 별달리 크게 나아질 것도 없이 당 서기장과 공화국 대통령이 연이어 바뀌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상표가 인민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그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관없었다. 딱히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항상 똑같은 공포, 똑같은 추위였으며 회색빛 풍경과 절망 속에서 기다림의 줄서기와 익명의 투서 등등 모든 것이 변함없이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둡체크란 이름의 새로운 제1서기 장이 튀어나와 조금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둡체크는 새로운 상표, 이번에는
사회 민주주의라는 상표를 원했고 사람들은 얼핏보고는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그는 이 나라는 유럽 개방 정책을 실시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프라하에서 북동쪽으로 2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회주의 맏형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Ch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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