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분리수거를 하러 오피스텔 정원으로 나오다가 한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들 입장은 다르니까, 최대한 위협이 되지 않게끔 멀찍이 떨어져서 분리수거 장소로 가려고 했다. 지나칠 때 움찔하면서 피할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고양이는 나를 가만히 주시하더니 몇 걸음 나를 향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프로관종러로서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내려가서 페트병,비닐봉지도 꾹꾹 지정장소에 우겨놓고 2층 정원으로 다시 올라섰는데...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귀한 순간이다, 나는 직감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에 길고양이 주려고 사두었던 Whiskas 1봉을 집어들고 2층 정원으로 헐레벌떡 나갔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녀석을 황망하게 찾다가 용기를 내어서 "고양아"라고 불러보았는데, 고맙게도 뒤에서 나타났다. 가지고 온 플라스틱 그릇에 Whiskas를 짜서 애 앞에 들이밀었다.

 

고요함과 차분한 기쁨이 내 마음을 다녀갔다. 그 전에만 해도 깊은 무기력증에 빠져 도대체 나란 인간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머리를 박고 식사하던 순간만큼은 온전한 행복을 느꼈다. 이 작은 생명체가 나한테 식비를 줄 것도 아니니, 대가관계가 전혀 없다는 점이 그 순간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로부터 몇주 지난 지금, 아직도 허덕이며 버티고 있다. 일과를 처리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그 와중에 내가 자격미달이라는 생각이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요즘은 그럴 땐 플라스틱용기에 주먹만한 얼굴을 들이밀고 배를 채우던 고양이를 떠올린다. 그 귀여운 친구, 그래도 내가 한끼는 먹였다.

 

고마워 고양아. 좋은 기억을 선물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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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잘 지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와 한바탕 하고 자취방에 도망치듯 와 있다. 자취방에 와서도 전화로 언성을 높이다가 차단하다가 다시 문자로 서로 상처를 주다가 또 차단했다. 옆방 사람이 이 소란을 듣고 뭐라고 생각할지.. 알고 싶지도 않다. 

 

우리 가족이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사람 한사람 뜯어보면 번듯해보이지만, 지난 삼십년 세월 동안 평온하게 보낸 개월수가 손에 꼽을 정도다. 누구 한명이 특별히 문제랄 것도 없고 누구 한명이 온전히 결백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엄마 아빠의 결혼, 그러니까 결이 전혀 다른 집안 간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내 탓인가? 내가 두분 결혼하시라고 등 떠밀었냐구요!

 

사춘기와 대학생 시절에는 이 모든 것이 괴로워서 친구에게 털어놓을 때도 있었다. 모두 속사정을 들어줄 법하다고 생각되는 꽤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더러는 공감하고 위로해주었고 더러는 도리어 내게 상처를 주었다. 물론 그 친구들이야 내게 상처 줄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 "가족 욕은 누워서 침 뱉기" (← 누가 몰라서 이러냐.. 오죽하면 너한테 털어놨겠니),
  • "이래서 가정환경이 안 좋은 사람과는 사귀면 안 된다" (←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비슷한 요지였음. 나를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것 같아서 충격 받았다. 그래놓고도 나에게 한동안 계속 연락했던 저의가 무엇인지.),
  • "OOO이 불쌍해!" (← 대충 가족구성원 한명만 일방적으로 편드는 말. 우리 가족 중에 피해만 본 사람은 없다.)

이 말들은 아직도 볼썽사나운 흉터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 더 잔인하게 들렸다. 따지고보면 그네들이라고 남의 가족사가 듣고 싶었겠나. 친구들이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가족사를 듣게 되었듯이, 나도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잔인한 말을 듣게 되었을 뿐.

 

그래서인지 요즘은 가족 이야기를 남에게 잘 하지 않는다. 마침 경제활동도 시작하게 되어 가족 스트레스를 돈으로 풀 수 있게 되었다. 독립하면서 나만의 공간을 가지게 되었고, 차를 몰게 되면서 이동의 자유가 생겼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그냥 시키고, 하고픈 운동이 있으면 회원권을 끊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여전히 있다. 돈지랄을 아무리 해도 구제되지 않는 날이 있다. 이 포스팅을 쓰게 된 이유다. 원치 않게 이 글을 죽 읽고 기분이 안 좋아지신 분들께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일전의 제 친구들처럼 절 위로할 의무감에 얽매이는 일은 없을테니 (...?) 지금이라도 백스페이스를 누르시면 되겠슴다. 

 

친구랑 친구 아버지와 신나게 공놀이 하다가 왔는데 집에 와보니 한바탕 난리가 나 있던 날. 그 낙차로 인한 절망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해? 누가 내 처지를 알고나 싶겠어? 누가 나랑 엮이고 싶을까? 방금 전까지도 나랑 같이 공놀이 하던 그 친구는, 내 가정사를 알면 다음에도 어울려 주려나? 

 

우리 가족이 하나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기도하고 버티다 보면 그런 날이 오겠지? 

 

일기장에나 적어야 마땅한 글이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매번 적으려니 답답했다. 망망대해에 띄우는 유리병 편지처럼 나와 어느 정도 무관한 사람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제 나는 남은 주말을 수습하러 가보겠다.

p.s. 이러고 몇시간 뒤에 엄마랑 통화해서 화해했다. 민망..하지만 해피한 결말에 감사를

아마도 비양도

나 정말 쉽게 사람 좋아하고, 사람에게 다가가고, 털어놓고, 기대곤 했었는데 점점 말을 아끼게 된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수다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적이고 예리하고 이해심이 많은 친구를 알게 되었다.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면 으레 그래왔듯, 그 친구에게 인생의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위로 받고 싶었다. 잠깐, 기시감이 드는데. 지나치게 솔직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친해지고 바로 그 이유로 뒤도 안 돌아보는 사이가 된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 소중한 관계에서 나는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치부를 까발리는 플라토닉 바바리맨을 자처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고 있다. 하지만 반성은 반성이고, 위로 받고픈 마음은 그대로 응어리져 남아 있다 보니 망상이란 것이 폭발하고 있다. 그 망상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마음속 깊은 근심을 솔직히 털어놓게 되고, 친구는 내 고민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내 처지를 마음 아파하며 위로해준다.. 

 

(속마음: 꼭 이렇게까지 상상을 해야 하나? 어휴)

 

친구가 내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상마저도 불가능했겠지.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이 이런 마음인가 싶다. 나는 조금 더 견딜 용의가 있으니 현실 속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태생적인 귀여움을 봤나. 

 

 

고양이 키우고 싶은데 집도 좁고 방음이 안 된다. 무엇보다도 내가 한 생명을 거둬들일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내 앞가림이나 잘 해야지.

 

Image credit: Getty Images

0-3으로 메드베데프 승. 치치파스가 나달과의 경기에서처럼 경기 흐름을 어떻게든 반전시켜주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힘이 다 빠졌나보다. 메드베데프는 코트를 종횡무진하면서 크로스코트, 패싱샷, 서브 다 꽂아넣는데, 치치파스는 100%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약간은 무기력해보였다. 3번째 세트에서 드디어 메드베데프 서브게임 브레이크에 성공하길래 설마 했으나, 역시로 끝났다. 치치파스가 네트플레이를 잘 활용하기는 했다만, 네트플레이만으로 파워스트록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는 사뭇 어려웠던 것 같다.

그나저나 메드베데프가 쓰는 라켓이 뭔고, 눈길이 갔다. 윌슨도 아니고, 바볼랏도 아니고, 헤드도 아니고, 요넥스도 아니고, 던롭도 아니다. 찾아보니 테크니화이버라고 1979년에 설립한 프랑스 라켓 제조업체인데, 라코스테 브랜드를 보유한 Maus Frères 그룹이 테크니화이버의 모회사를 2017년에 인수하였다고 한다 (링크). 이가 스비아텍 (Iga Swiatek)도 테크니화이버를 쓴다고. 

 

메드베데프는 이제 조코비치를 만나러 간다. 메드베데프의 조코비치 상대전적은 7전 3승 4패. 경기가 빨리 끝나진 않을 것 같다. 러시아 선수 카라체프의 설욕을 메드베데프가 대신 해줄 수 있을지? 조코비치가 호주오픈의 수문장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기대된다.

 

 

 

 

What is perfect in life? Nothing.

인생사에 완벽한 것이 있나? 없다.

그림 누르면 영상으로 이동함

여성 원핸더는 단연 쥐스틴 에넹. 이분이 은퇴하기 전에 생중계로 테니스 경기를 봤었어야 했는데.. 이땐 테니스에 빠지기 전이었다.

경기 결과에 충격 먹은 것이 아니라, 치치파스의 표정과 제스처를 보고 충격 받았다. 내가 알던 치치파스는

 

Stefanos being very true to his emotions..

 

위 영상에서 보듯 이따금 사소한 자극에도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는데, 이번 경기에서 그 낌새를 거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경기 뿐만 아니라 코키나키스와의 경기에서도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서 치치파스가 성격적인 측면에서 많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성격을 완전 개조한 것일까, 아니면 경기시간 동안만이라도 감정을 일시적으로 외면하거나 인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까? 한가지 확실한 점은, (부정적인) 감정 분출이 경기 운영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치치파스가 깨달았다는 것이다. 

 

조코비치와 즈베레프는 이번 호주오픈에서도 라켓 참교육을 시전하였고 (링크1, 링크2), 스탠 바브린카도 2R에서 실망감을 라켓으로 표현하였다 (영상의 9분 22초대). 테니스 경기를 지켜본 지 4년이 넘어가는 동안 짜증을 내던 선수들은 여전히, 아직도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리스 장발 원핸더는 2019년 호주오픈에서 페더러를 이긴 이후 약 1,2년간 거친 언행과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더니, 갑자기 잠잠해졌다. 다혈질적으로 흥분하는 태도가 경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실천에 옮겼다. 깨달은 건 둘째 치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하다니.. 그것도 이제 20대 초반에 접어든 신인 선수가.

 

쿠크다스 멘탈 보유자로서, 치치파스의 이번경기 press conference는 꼭 봐야겠다. 방금 올라온 on-court interview를 보니 짐 쿠리에도 치치파스의 멘탈 강화가 인상 깊었는지 재차 묻고 있다.

 

세번째 세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작은새처럼 날라다녔고 모든게 풀리기 시작했어요. 지금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정을 일정히 유지하기로 결심하고 경기에 임했는지에 대해) 네, 오늘 그러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가 몇몇 경기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요.. 감정 기복을 줄이고 중요한 순간에 침착했던 것이 오늘 경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시간으로 금요일 오후 5:30에 치치파스는 메드베데프를 상대로 경기를 치룬다. 2018년 경기에서 두 선수 간 해프닝이 있었는데 (bullsh*t russian), 이번 경기는 그래서인지 경기내용보다는 두 선수간 악수가 어떨지에 더 관심이 간다. (?)

 

 

 

 

2021 호주오픈 경기를 간간히 챙겨보고 있는데, 이목을 끄는 특이사항이 몇개 있다. 예를 들면,

 

# 선심이 사라졌다.

경기를 보다보니 ball person만 보여서 선심이 어디 갔나 했다. 이번 호주오픈에는 기계 판독을 전격 도입하여 in-out을 판단하기로 한 모양. 주심만 유일한 인간 심판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도 기계에 의한 시그널 (서브 렛, 아웃 등)을 선수에게 전달해주고, 관중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어 무기력해보였다. 기계가 Out 콜한 것을 주심이 over-rule할 수 있는지 규정이 매우 궁금한 상황.

 

# 오랜만에 관중 함성소리를 듣게 되었다.

근 1년간 그랜드슬램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얼마 전 호주 아델라이드 오픈에서도 상당수의 관중이 있는 걸 보고 충격 먹었는데, 알고 보니 호주가 최근 Covid 신규 확진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멜버른 파크에서 Covid 감염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전문가적 판단이 있어 호주오픈도 관중을 받기로 한 모양이다 (기사 링크). 일방적으로 자국 선수 응원하고 선호도가 떨어지는 선수를 은연중에 방해하는 관중소리가 이따금 짜증나기는 했지만, 없는 것 보단 나았다. 솔직히 그리웠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빅토리아 주에서 Covid 감염사례가 확인되어 다시 Lockdown 모드로 돌아가는 중. 조코비치-프릿츠 경기 중 함성소리가 어마어마했는데, 다시 채널 돌려보니 적막만이 흘러서 무슨 일인가 했네. 경기 중에 강제 귀가조치를 했다고 (링크 1, 링크 2). Covid 재확산 위험 없이 호주오픈이 무사히 끝나고 모두가 건강하기를 빈다. 

 

# 기아 엠블럼이 바뀌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관전 중에 KN이라는 마크가 보여서, 기아가 후원자 목록에서 빠지고 KN이라는 기업이 들어왔나 했는데, 기아 엠블럼이 바뀐 거였다. 그것도 2020년 10월에... 시사에 무심한 내 특이한 성격에 다시한번 감탄하고 간다.

 

(+) 팀-키리오스 단식경기, 조코비치-프릿츠 단식경기를 지켜보면서 멘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팀은 키리오스를 맹렬히 응원하는 관중 분위기에 맞서야 했고, 조코비치는 오른쪽 갈비뼈 부근에 통증을 느끼는지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두 경기 모두 풀세트 접전에 들어가서야 결론이 났다. 

 

반면 나는 방해요소가 없더라도 알아서 멘탈이 자멸하는 인간인데.. 멘탈 관리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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