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분리수거를 하러 오피스텔 정원으로 나오다가 한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들 입장은 다르니까, 최대한 위협이 되지 않게끔 멀찍이 떨어져서 분리수거 장소로 가려고 했다. 지나칠 때 움찔하면서 피할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고양이는 나를 가만히 주시하더니 몇 걸음 나를 향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프로관종러로서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내려가서 페트병,비닐봉지도 꾹꾹 지정장소에 우겨놓고 2층 정원으로 다시 올라섰는데...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귀한 순간이다, 나는 직감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에 길고양이 주려고 사두었던 Whiskas 1봉을 집어들고 2층 정원으로 헐레벌떡 나갔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녀석을 황망하게 찾다가 용기를 내어서 "고양아"라고 불러보았는데, 고맙게도 뒤에서 나타났다. 가지고 온 플라스틱 그릇에 Whiskas를 짜서 애 앞에 들이밀었다.

 

고요함과 차분한 기쁨이 내 마음을 다녀갔다. 그 전에만 해도 깊은 무기력증에 빠져 도대체 나란 인간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머리를 박고 식사하던 순간만큼은 온전한 행복을 느꼈다. 이 작은 생명체가 나한테 식비를 줄 것도 아니니, 대가관계가 전혀 없다는 점이 그 순간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로부터 몇주 지난 지금, 아직도 허덕이며 버티고 있다. 일과를 처리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그 와중에 내가 자격미달이라는 생각이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요즘은 그럴 땐 플라스틱용기에 주먹만한 얼굴을 들이밀고 배를 채우던 고양이를 떠올린다. 그 귀여운 친구, 그래도 내가 한끼는 먹였다.

 

고마워 고양아. 좋은 기억을 선물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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