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파스와 코키나키스 매치를 보았다. 

첫 세트부터 타이브레이크로 돌입,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결국 5세트 풀접전으로 접어 들었다. 코키나키스는 키리오스와 친하고(?), 치치파스는 경기 중에 아버지한테 대든(??) 전적이 있는 터라 두 선수 모두 멘탈이 약할 거라 속단했다. 그래서 2시간 내외면 끝날 줄 알았는데, 네시간 반동안 지속되어서 굉장히 놀랬다. 게다가 두 선수 모두 안전하게만 플레이하려 하지 않고 위닝샷을 많이 구사해서 경기가 늘어지지 않고 박진감이 넘쳤다. 결과적으로 치치파스가 6-7, 6-4, 6-1, 6-7, 6-4로 3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경기 초반에 치치파스 상체가 뒤로 밀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코키나키스 공에 무게감이 실려서인가 싶어 두 선수 프로필을 찾아봤는데, 둘이 신장은 똑같이 193cm이고 체중은 오히려 치치파스가 5kg 더 무겁대서 당황스러웠다. 코키나키스가 몸통 회전을 더 잘하는건가, 신체구조가 남다른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번외로, 디에고 슈워츠맨은 단신인데도 뒤로 상체가 젖혀지는 느낌이 거의 안 들던데, 왜지...)

 

코키나키스가 84kg으로 치치파스보다 5kg 가볍다. (출처: ATP)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치치파스가 메드베데프랑도 실랑이를 벌이는 등 다혈질적인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오늘 멘탈을 굳게 부여잡는 모습을 보여줘서 의외였다. 서브시간 및 코칭으로 경고를 받고, 자국 선수에 대한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 등이 겹치면서 평정심이 많이 흔들렸을 법 했는데 꾹 참고 승리로 화답하더라. 신기했고, 조금더 지켜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빨리 성숙해졌다니..? 

 

오늘 치치파스의 승리 원인은 1. 평정심을 지키고, 2. 공격적인 시도를 아낌없이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브레이크 기회를 상당수 확보하고, 네트 어프로치도 32번 하는 등 파워게임에서의 열세를 전환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 이 포스팅을 작성하는 와중에 나달이 관중석에 앉은 어떤 여자에게 손가락 욕을 먹고서는 어안이 벙벙해하고 있다. 이내 웃고 넘기더니 서브 에이스를 꽂아넣는 간지를 선사함.

어이없어 웃는 나달. 월클 멘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마스터즈 급 대회인 이탈리안 오픈에서 이변이 많았다. 18살짜리 루키인 로렌조 무세티가 잔뼈 굵은 바브린카와 니시코리를 꺾었고, 170cm 단신선수 디에고 슈워츠먼이 흙바닥에서 흙신 나달을 꺾었다.

2018 호주 오픈에서 나달과의 경기를 지켜본 일이 있었는데, 순간 '슈워츠먼 승산이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키가 작은 것 치고는 테니스를 잘한다는 말은 굉장히 부적절했다. 키를 떠나서 정말 잘하는 선수다. 그라운드스트로크도 기본적으로 좋지만, 제일가는 장점은 볼 컨트롤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로브, 드롭샷, 발리, 트위너(..)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네트플레이를 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다양한 샷메이킹 능력이 뒷받침 되어주니 상대선수 발이 묶이게 공을 잘 찔러넣는다. 

이번 나달과의 경기에서 디에고의 화려한 샷메이킹을 볼 수 있다. 발군의 컨트롤이다. 

이날의 Vamos는 디에고의 것

이번 마스터즈 대회에서는 아쉽게도 조코비치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이 경기도 처음에는 조코비치 게임을 두번이나 브레이크했다. 디에고는 명경기 장인이네. 

JTBC에서 슈워츠먼 경기해주는 날은 무조건 챙겨봐야 겠네.

 

 

 

 

 

바라던 대로 도미닉 팀이 2020 US Open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Congrats Domi!

 

항상 진지한 태도가 돋보이는 선수라 (유튜브 등 SNS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것 같다. 그랜드 슬램 준우승만 3번 해서 안타까웠는데 오늘 그 한을 푼 것 같아서 나도 내 일인마냥 기분이 좋다. 사샤 즈베레프도 졌지만 잘 싸웠다. 첫 2세트 가져갔는데도 결과가 준우승이어서 즈베레프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울 것 같다. 하지만 즈베레프는 이제 겨우 23살이고 젊으니까, 앞으로도 그랜드 슬램 우승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팀은 27세로 나이가 더 많은데, 이 사진은 즈베레프가 형 같다 (출처: 조코비치 트위터)

 

롤랑가로스가 일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US Open에 불참한 라파엘 나달과 달리 (체력적) 회복이 걱정되지 않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도미닉은 그 정도 기간이면 체력 회복은 걱정 없다고 쿨하게 답했다. (인터뷰 링크 7분 30초경) 멘탈을 다잡는 게 더 중요하단다. 강한 남자 도미닉.. 롤랑가로스에서도 좋은 결과 있기를 희망한다. 2018 2019 프랑스 오픈 준우승이 과거전적인 이 시점에서, 좋은 결과란 라파엘 나달을 잡고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겠지만... (과연?)

 

이쯤에서, 2020 US Open 경기를 깔짝깔짝 지켜보면서 느꼈던 소회를 적고 마쳐야겠다. 프랑스오픈이 바로 다음주 월요일에 시작인데, 롤랑가로스도 US Open처럼 코로나 감염 걱정 없이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 권순우

 

 

권순우! 실력이 좋고 게임 전략을 잘 가져가는 것 같다. 정현보다 샷이 조금 더 날카로운 것 같기도 하고.. 샤포발로프 상대로도 잘 하면 승산이 있었는데, 체격/체력 차이가 있어서인지 안타깝게도 졌다. 하지만 샤포발로프도 유망주 취급받는 선수인데 권순우 샷플레이가 크게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체력을 조금 더 기르면 되겠다는 희망을 본 경기였다.

이날의 깨알 포인트는 권순우의 킷캣이었다. 브레이크 타임에 킷캣이 권순우 자리에 놓여있는 걸 보자마자 손승리 해설위원이 영양학적인 지식을 거론하며 실망스럽다고 한탄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킷캣 먹는 권순우도 이해가 되었고, 한국 선수가 월클이 되기를 바라는 손승리 해설위원의 간절한 마음도 느껴져서 웃펐다. 암튼 권순우 선수의 창창한 앞날을 기대하고, 정현, 이덕희 선수도 곧다시 그랜드 슬램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샤포발로프

내 비록 테니스 덕질(?) 기간이 짧으나, 샤포발로프와 즈베레프의 멘탈이 많이 개선되었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한때 즈베레프는 라켓 스매싱에 조예가 깊었으나 이번 US Open에서는 참으려는 모습이 보였다. 샤포발로프도 홧김에 라켓으로 날린 공이 주심의 얼굴을 가격하여 실격패 당한 경험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범실도 과거 대비 줄어들었고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카레뇨 부스타와의 경기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옷을 찢은 것 같지만.. 

 

샤포발로프의 저 티셔츠는 안드레 애거시의 예전 경기 복장을 오마주한 것이란다

 

그래도 기대되는 선수 중 한명. 펠리시아노 로페즈 이후로 왼손잡이 한손백핸드 선수는 잘 보지 못했던 터라, 더 오래 봤으면 좋겠다!

 

테니스 경기를 오래 지켜보다 보면 (그 선수는 내 이름도 모르는데) 등장인물들한테 정이 들어버려서, 무작정 미워할 만한 선수가 없다. 펠릭스 오저알리아심, 알렉스 드미노, 다닐 메드베데프 등등 영건들도 잘 되었으면 좋겠고, 나름 짬밥 먹은 칠리치나 고팽 같은 베테랑 선수들도 재도약했으면 좋겠다. 빅3 및 앤디 머레이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두말할 것도 없고. 

 

무관중 (혹은 최소한의 관중)으로 치러진 이번 US Open 뭔가 허전했지만, 이렇게라도 간간히 선수들 얼굴 봐서 즐거웠다. 앞으로도 테니스 경기를 계속 챙겨볼 수 있도록 이 스포츠가 흥했으면 좋겠다. 이번 프랑스오픈 생중계는 JTBC Golf&Sports 채널에서 9월 28일부터 시작하니 추석 연휴를 십분 활용할 생각이다. 실격패로 고개를 떨궜던 조코비치도, 코로나로 US Open 불참을 선언했던 나달도 나올테니 상당히 재미질 것이다.

 

 

 

 

며칠전 조코비치가 실격패를 당하면서 US Open에 이변이 일어났다. 공으로 선심의 목을 가격했다는 이유로, 조코비치는 그 고의성을 막론하고 실격패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2020 US Open에서 득한 점수와 상금도 토해내게 되었다. Grand Slam rulebook에 있는 규정을 적용한 결과라니 토달 수는 없다. 하지만 조코비치의 비호감 이미지를 한번 더 재확인한 기분이 드는 건은 어쩔 수 없다.

빅3 중에서 조코비치를 제일 안 좋아하는데도, 조코비치가 억울하게 과소평가 당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말을 바로 하자면, 테니스계가 조코비치의 실력을 과소평가한다기 보다는, 까닭없이 미워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령 2019년 US Open에서 조코비치가 부상으로 기권했을 때 터져나온 관중의 야유에 나는 충격 먹었다. 볼보이한테 폭언을 한 것도 아니고, 주심에게 격하게 항의한 것도 아니고, 라켓을 조져버린 것도 아닌데, 그저 경기를 계속할 몸상태가 아니어서 기권한 것이 그리도 매도당할 일인지? 과거에도 조코비치를 향해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온 것을 종종 목격하였지만, 2019년 US Open 바브린카와의 경기로 조코비치를 향한 아니꼬운 시선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His eyes are evil"이라는 유튜브 댓글도 봤는데, 서양에도 관상가가 있군요?

앤디 로딕을 이겼을 때에도 야유 받았었네.

조코비치는 왜 이렇게 (억울하게) 미움받는가? 조코비치의 지나친 승부욕이 테니스 팬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경기가 잘 안 풀릴 때 조코비치의 화풀이는 라켓 조지기 (...)와 짜증 섞인 포효로 표출될 때가 많다. 즈베레프의 화풀이도 비슷하다. 이 두 선수 경기를 지켜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확 올라온다. 테니스 팬들이 생각하기에 테니스란 신사적인 스포츠인데, 테니스 선수들이 한 포인트/게임 따고 잃는 것에 "너무 연연해하는" 모습이 쿨하지 않고 ugly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슷한 맥락에서, 포인트를 땄을 때 상대 선수를 도발하는 듯 "Come on!"을 연발하는 행위도 별로 좋지 않게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켓을 조코비치만 분지르는 것도 아닌데.. 흠.

이 말 하면 조코비치 팬 분들이 굉장히 화내시겠지만.. 라켓을 부수는 장면을 볼 때 관객도 나름의 궁예질을 하게 되는데, 내 경우에는 조코비치의 라켓 조지기와 바브린카의 라켓 조지기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둘 다 별로지만, 조코비치의 라켓 조지기는 "왜 경기가 내 맘대로 안 풀리지? 짜증나!"의 느낌인데, 바브린카의 조지기는 "왜 오늘 내 실력이 이거밖에 안 되지? 화나!"의 느낌이다. Locus of control이 조코비치는 외부에 있다면, 바브린카는 내부에 있는 기분.. 아 진짜 궁예질이네.. 

위 인식을 알아서인지는 몰라도, 노박은 평소에는 유쾌하고 신사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 롤랑가로스에서 볼보이에게 라켓도 쥐어주게 하고 음료수 건배도 하며, 경기 이길 때 마다 Heart 세러머니를 한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조코비치의 열망이 삐죽 튀어나온 사건이 코로나 감염으로 이슈가 된 아드리아 투어였다고 생각한다. 수천명 관객 입장, 경기 이후 애프터파티 개최, 친선 농구 경기 등 많은 사항이 문제시되었는데, 이러한 결정에는 "Fun-to-be-with" person이 되고 싶다는 조코비치의 속내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또 궁예질을 시전한다.

계속 써내려가다 보니 이상한 글이 되었다. 조코비치가 억울하게 미움받는다는 글을 쓰려고 한건데, (나도 조코비치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터라) 그 야멸찬 시선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 시선을 정당화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경기 중에는 짜증을 낼지는 몰라도 매 포인트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경기가 끝나면 깔끔하게 승복하며 상대 선수에 대한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트래시토킹하는 것을 잘 못 보았다. 악동 닉 키리오스와 비교하면 양반인데, 왠지 닉 키리오스가 더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다. 

US Open의 철퇴를 맞은 후 조코비치는 SNS에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다시 멋지게 복귀했으면 좋겠고, 그때에는 좀 더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 US Open 트로피는 도미닉이 들어올렸으면.. (쿨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