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서가에서 펴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퍼스널컬러는 제주신라호텔이었구나? 연분홍색 표지와 푸른 배경이 사뭇 잘 어울린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펴낼 때 출판사 소전서가가 세심하게 신경 쓴 부분은 표지 디자인뿐만이 아니다. 매 챕터에 이상이 그린 삽화와, 또 맨 뒤에는 '배우신 분들'의 대담을 실었다. 특히 대담이 실려 있는 점이 감동 포인트였는데, 대담을 통해 구보가 경성을 하릴없이 거닐었던 이유, 이 소설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간의 관계성, 이 소설의 디자인적인 측면, 그리고 소설가 박태원과 이상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담'에서 '박태원 그리고 구보의 고현학'을 인상 깊게 읽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는 <모데로노로지오>라고 표현되는 모더놀로지(modernology), 즉 고현학은 '지금의 모습을 그리자!'라는 기치 아래 고고학과 비교되어 나온 용어로, 곤 와지로가 1920년대 관동 대지진 이후 재건되는 도쿄 모습을 기록하기를 주창한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당대를 관찰해보려는 행위인건데, 소설가 박태원과 구보는 글쟁이이니 고현학에 관심이 갈 법하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고현학을 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환경이었고, 그 부분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보여주고 있다.      

그저 나와 비슷한 성향(추정컨대 INFP?)이라 구보가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낸 것으로만 여겼는데,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의 걸음걸이에 녹아있었던 것.

유승환: 저는 이 고현학이라는 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지 작가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현학의 성과를 보여 주는 작품이 아니라, <그게 가능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 삼습니다. 구보 씨가 산책 나갈 때 들고 다니는 아이템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단장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정: 노트.
유승환: 무언가를 봤을 때 노트에 적어야 고현학이죠. 근데 이 작품에서 구보가 고현학을 하기 위해 노트를 펴는 장면이 얼마나 나옵니까? 딱 두 부분이 있어요.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구보가 노트는 계속 들고 다니면서 딱히 뭘 적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유승환 님에 의하면 구보가 노트를 펼치는 두 장면은 아래와 같다.

  1. '젊은 아낙네가, 실수로 떨어뜨린 복숭아가 바세도우씨 병에 걸린 노동자에게까지 이르르자 집어들기를 단념'한 일련의 과정을 구보가 기록하려고 노트를 펼쳤다가 근처의 사복경찰을 목도하고 기록을 포기한다.
  2. 친구와 카페에 가서 여급들과 놀 때 농담 따먹기로 서로의 정신병을 명명할 때 노트를 다시 펴든다. 다시말해 구보는 고현학을 하기 위해 노트를 지참했음에도, 막상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인 것은 밤 카페라는 닫힌 장소에서였음을 유승환 님은 지적한다.


머리가 띵했다. 온종일 이어지던 구보의 실없음에 나는 일견 공감하기도 했지만 한심하게 보기도 했었는데, 사실 구보는 검열과 감시를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견뎌내고 있었구나. 구보가 '명랑을 가장한다'는 문구가 몇번 나왔는데, 검열과 감시가 이루어지는 환경에서는 무해한 시민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 결과가 아니었을지.

유승환: 이곳이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서소문정에 왜 못 갈까?>라는 문제가 일단 하나가 있잖아요. 서소문정이라고 하면 서촌으로 가기 위한 입구입니다. 지금도 시청에서 서소문동을 지나 죽 올라가면 서대문 쪽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오죠. 그렇게 서대문, 소위 서촌으로 죽 가면 마주치는 장소들이 독립문이나 서대문 형무소 같은 곳이죠. 그러니까 사라져 버린 조선, 혹은 조선 독립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들이에요. 그렇다면 거기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는 건에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닐까.
김미영: 검열을 의식한다는 거겠지요.
유승환: 정작 검열이 두렵다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검열 때문에 검열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못하는 거죠. 그 대신 구보는 자기가 신경 쇠약에 걸려서 거기에 가지 못한다고 말해요. 근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이 작품 초반에 구보는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신경 쇠약이라고 해요. 농담이에요.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에요.
사실 검열 때문에 검열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못하는 거죠.


추가적으로, 11장에 본인의 신경쇠약을 의식하는 동시에 옆을 지나쳐가는 건장한 사내에게 위압감을 느끼며, 어릴 적 『 춘향전』을 읽었던 일을 구보가 후회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 춘향전』이 어디가 어때서? 야시꾸리한 내용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그러나?'라고 의심스레 여겼었다. 하지만 대담을 읽으며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승환: (중략) 그러면서 구보는 <그럼 내가 언제부터 이런 신경 쇠약에 걸렸을까?>하며 11화부터 『 춘향전』 이야기를 합니다. 박태원의 다른 산문을 보면 자신의 문학적인 경험의 시작으로서 취학 이전에 『 춘향전』을 탐독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 춘향전』을 읽은 건은 박태원 문학의 출발점이죠. 그런데 박태원은 바로 그 춘향전을 볼 때부터 내가 이미 신경 쇠약에 걸릴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김미정: 작가의 운명.
유승환: 작가는 신경 쇠약이라는 병에 걸리는 존재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식민지 조선에서 문학을 한다는 건 자체가 일종의 공포, 신경 쇠약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되는 공포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구보 씨. 소설가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은 문장인 줄도 모르고..

대담에는 고현학 외에도 시대적 배경과 주변부 사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대담을 읽고나면 확실히, 한 소설가의 밋밋하고 실없던 하루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대담은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그나저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당시 이상이 삽화가로 참여했다는 점이 신기하다.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본래 전공은 건축과인데다가 삽화도 그리다니, 다능인이었구나.

19화, 29화, 30화에 삽화가 빠져 있는데 이상이 그날 개인적인 문제로 그리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포인트.

어머니는 다시 바느질을 하며, 대체, 그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해본다.
하지만, 보통학교만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회사에서 관청에서 일들만 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불 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해도 일자리가 없다는 건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해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 군데라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때, 구보는 차라리 고독에게 몸을 떠맡겨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자기는 고독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꾸며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amp;amp;hellip;
그러나, 여자가 청량리행 전차 속에서 자기를 또 한 번 발견하고, 그리고 자기가 일도 없건만, 오직 여자와의 사이에 어떠한 기회를 엿보기 위해 그 차를 탄 것에 틀림없다는 것을 눈치챌 때, 여자는 그러한 자기를 얼마나 천박하게 생각할까. 그래, 구보가 망설거리는 동안, 전차는 달리고,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면서도 구보는 그 비극에서 자기네들을 구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려 들지 않았다.
결혼 비용 삼천 원. 신혼여행은 동경으로. 관수동에 그들 부처를 위해 개축된 집은 행복을 보장하는 듯싶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거의 일시에 머리를 돌리고 그리고 구보는 그의 고요한 마음속에 음울을 갖는다.
&amp;amp;amp;amp;amp;amp;amp;amp;amp;lt;모데로노로지오&amp;amp;amp;amp;amp;amp;amp;amp;amp;gt;를 게을리하기 이미 오래다.
때마침 옆을 지나는 장년의, 그 정력가형 육체와 탄력 있는 걸음걸이에 구보는, 일종 위압조차 느끼며, 문득 아홉 살 때에 집안 어른의 눈을 기어 『 춘향전』을 읽었던 것을 뉘우친다.
구보는 이 조그만 사건에 문득, 흥미를 느끼고, 그리고 그의 &amp;amp;amp;amp;amp;amp;amp;amp;amp;lt;대학 노트&amp;amp;amp;amp;amp;amp;amp;amp;amp;gt;를 펴들었다. 그러나 그가 문 옆에 기대어 섰는 캡 쓰고 린네르 쓰메에리 양복 입은 사내의, 그 온갖 사람에게 의혹을 갖는 두 눈을 발견하였을 때, 구보는 또다시 우울 속에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황금을 찾아, 황금을 찾아, 그것도 역시 숨김없는 인생의, 분명히, 일면이다. 그것은 적어도, 한 손에 단장과 또 한 손에 공책을 들고, 목적 없이 거리로 나온 자기보다는 좀 더 진실한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자에게 쉽사리 미소를 보여주었다고 새삼스러이 여자의 값어치를 깎을 필요는 없었다.
「이리 온.」 그러나 강아지는 먼젓번 동작을 또 한 번 되풀이하였을 따름, 이번에는 입을 벌려 하품 비슷한 짓을 하고, 아주 눈까지 감는다.
사실, 그는, 지금 벗을 가진 몸의 다행함을 느낀다.
구보는 그저 『 율리시스』를 논하고 있는 벗을 깨닫고, 불쑥, 그야 &amp;amp;amp;amp;amp;amp;lt;제임스 조이스&amp;amp;amp;amp;amp;amp;gt;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 게지. 그러나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할 까닭이야 없지.
그들의 세상살이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속으로 지난날의 조그만 로맨스를 좀 더 이어 생각하려 한다.
그는 여자가 기독교 신자인 경우에는 제 자신 목사의 졸음 오는 설교를 들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공원 안을 그들은 생각에 잠겨, 생각에 울어,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 헤매 돌았다.
구보는 대체 무슨 권리를 가져 여자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농락하였나.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게도 단순하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따랐다.
문득, 제비와 같이 경쾌하게 전보 배달의 자전거가 지나간다. 그의 허리에 찬 조그만 가방 속에 어떠한 인생이 압축되어 있을 것인고.
구보는 자기가 이러한 사내와 접촉을 가지게 된 것에 지극한 불쾌를 느끼며, 경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와 사이에 간격을 두기로 하였다.
어느 틈엔가 종로에까지 다시 돌아와, 구보는 갑자기 손에 든 단장과 대학 노트의 무게를 느끼며 벗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구보는 온갖 사람을 모두 정신병자라 관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럼 이 세상에서 정신병자 아닌 사람은 선생님 한 분이겠군요.
그 맑은 두 눈은 그의 두 뺨의 웃음우물은 아직 오탁에 물들지 않았다.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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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2 - [도서] - (#1)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고




 

 


Chapter 2 '알파고: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에서는 체스나 바둑과 같은 보드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을 능가하게 되었는지, 그 로직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여러가지 개념이 한꺼번에 다루어지고 있어 다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특히 몬테카를로 방식이나 정책망&가치망에 대한 설명은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러나 저러나 이해가 안 되도 계속 읽어나가는 것으로. 성경 말씀도 내 머리로 안 풀어지는데 어떻게든 읽어나가는 것처럼 말이지. 머릿속에 담아두고 계속 들여다보면 언젠가는 풀릴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경로를 탐색하는 것을 완전 탐색(Exhaustive Search)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든 경로를 탐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좀 더 효율적으로 탐색하기 위해, 한 번 탐색해보고 성과가 없다면 그쪽은 더 이상 탐색하지 않도록 표시해두면 되기 때문이죠. 미로찾기에서 막다른 길로 이어지는 경로를 표시해뒀다가 다음번에는 그 경로로 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컴퓨터 과학에서는 가지치기(Pruning)한다고 표현합니다. 막다른 길은 더 이상 가볼 필요가 없기에, 이 경로는 나뭇가지 자르듯 쳐내버리고 다시는 탐색하지 않는 거죠. 이렇게 하면 불필요하게 탐색해야 하는 경로를 제외할 수 있어 그 다음부터는 전체적인 탐색 속도가 빨라지며, 더 효율적으로 탐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딥 블루는 체스의 수를 계산할 때 이처럼 탐색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의 수를 가지치기를 거쳐 배제해 계산을 점점 줄여나갔습니다. 이외에도 오프닝과 엔드게임 테이블베이스를 활용하면서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더 과감히 생략했죠.  
- 2. 알파고: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 (딥 블루는 어떻게 체스 챔피언이 되었을까?)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전개형 보드게임에 임하는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방식을 취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예단하기로는 인공지능이나 컴퓨팅 능력이 발전하면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전수계산방식을 취할 줄 알았는데, 가망이 없어보이는 루트는 재빨리 괄호 밖으로 빼버리는 인간과 같은 로직으로 구현해내려 했다는 점이 신기하다. 물론 게임트리 측면에서 봤을 때 바둑에서 완전탐색을 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미래에 하드웨어 계산성능이 좋아진다면 완전탐색을 추구하려 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좌우지간 완전탐색을 구현하지 않음(혹은 못함?)으로써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한번이라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알파고는 왜 신의 한 수를 허용하고 말았을까요?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봅시다. 알파고의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은 유망한 수를 중심으로 꼼꼼하게 탐색해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률이 높은 쪽을 향해 더 많이 더 깊게 탐색해나가고 가장 신뢰가 놓은 지점에 착수를 하는 원리죠. 하지만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 지점에 착수할 확률을 알파고는 1만 분의 1로 매우 낮게 예측했다고 합니다. 알파고는 설마 그 지점에 둘 줄은 몰랐기에, 충분히 탐색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제한 시간 내에 1억 번 정도 탐색할 수 있다면 다른 곳은 수백만, 수천만 번씩 탐색한 데 반해 그 지점은 수십 번도 채 탐색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지점이 묘수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내지 못하는 거죠. 애초에 탐색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78수 다음에 대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알파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세돌이 78수를 착수하는 순간, 미처 충분히 탐색하지 않았던 알파고는 그제서야 당황하게 됩니다.
- 2. 알파고: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 (신의 한 수)
알파제로와 겨룬 스톡피쉬는 초당 7,000만 번의 수를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더 이상 이렇게 많은 수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약 8만 번 정도만 계산했는데 스톡피쉬와 비교해보면 1/875에 불과합니다. 각종 체스 규칙과 다양한 전술을 미리 입력해 두고 활용하는 스톡피쉬와 달리 알파제로는 어떤 체스 전략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강화학습으로 스스로 학습한 다음,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효한 수만 찾아 마치 직관에 따른 것처럼 다음 수를 두었죠.
- 2. 알파고: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 (인간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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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관련 책을 찾아 읽는 것뿐이다.

시류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기업이나 국가가 LLM을 비롯한 인공지능에 의구심이나 회의감을 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국내 대형 출판사도 인공지능을 업무에 활용하는 방법을 다룬 영상을 올릴 뿐, 판단할 권리와 의무를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손쉽게 이양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지는 않는다. 일터에서도 인공지능을 업무에 활용할 궁리를 회사 차원에서 하고 있기에, 관련 담당자분께 인공지능이 적극 도입된다면 주니어 교육과 업무 검토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 여쭤보니, 일단 답만 맞으면 된거 아니냐는 식의 뜨악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기업이 아무리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 해도 말이지, 가치판단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실은 돈이지. 다 돈이야. 물론 나도 돈이 좋지만, 숙고가 필요한 사항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세계적으로 ESG니 친환경이니 지구온난화니 그렇게 난리를 쳐대면서, 인공지능 구동하려고 돌아가는 데이터센터에서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열기는, 그건 뭐 없는 셈 치기로 한건가?

그런데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내가 관련 보직을 맡았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일단 맡았으니 직무는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 한다. 어차피 인공지능 꼴보기 싫다고 내외했다간 그 결과가 불보듯 뻔하다. 내 턱 밑까지 와서 "나 이만치 따라잡았어. 이제 어쩔테야?"라고 어퍼컷을 날릴 게 뻔하다. 그러니.. 관련 공부를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나저러나 한참 부족하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책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표지의 각 칸의 그림은 이 책이 다루는 여덟까지 꼭지를 의미한다.


이 책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지식')은 그런 사고흐름 속에서 고르게 되었다. 원래 종이책으로 사뒀었는데 밀리의서재에도 있기에 이북리더기로 읽어나가는 중이다.

우리 곁을 떠난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은 살아생전에 “인공지능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 는 “인공지능은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라며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정복한다거나 인류의 존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죠.
그러는 사이, 인공지능은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습니다.
-  들어가며
챗GPT, GPT-4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기술은 분명한 공학이며 그 원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독자 여러분께 알리고 싶었습니다.
- 들어가며


저자인 박상길 님은 기술 옹호론자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은 니편내편 따질 때가 아니고 인공지능의 유형과 원리를 탐색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새삼스레 알게 된 사실은, 챗GPT 이전에도 인공지능이 생활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챗GPT나 미드저니, 소라의 출현과 물리적 실체를 지닌 로봇의 발전으로 내가 이리 위협을 느끼는 거지, 이미 자동차와 기계번역, 검색엔진에 인공지능이 녹아있었구나. 하지만 몇해전까지만 해도 인간을 보조하는 수준으로만 인공지능이 존재했을 따름인데, 오늘날 인공지능은 창작의 영역을 이미 침범했다. 그 지점에서 나는 공포감을 느낀다.

그건 그렇고.. 아직 읽어나가는 중이지만 설명이 매우 깔끔하고 포인트를 잘 짚어내고 있다. 인공지능을 이제 갓 접한 나도 언뜻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으로 인공지능 발전의 역사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이 사고 싶다. 더불어 정진호 님의 그림 또한 줄글 설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장에서는 머신러닝(딥러닝) 작동방식에 대한 설명과, GPU 작동방식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그전에는 CPU와 어찌 차이가 나는지도 몰랐고 감도 잡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GPU하면 '병렬연산'이라는 키워드가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명확한 이미지가 머리에 박혔다.

일단은 계속 읽어나가고, 계속 기록해보기로 한다.

1956년 다트머스대학교에서 ‘지능을 가진 기계’를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립니다. 이곳에 모인 학자들은 처음으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고 사용하게 되죠.
- 1. 인공지능: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 (진정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다)
머신러닝이란 말 그대로 기계Machine가 스스로 학습Learning을 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규칙을 입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컴퓨터가 데이터에서 스스로 규칙을 찾아냅니다. 더구나 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규칙도 컴퓨터가 학습을 거쳐 찾아낼 수 있게 되었죠.
 
변형에 따른 무수한 변칙까지도 데이터를 이용해 모두 찾아낼 수 있게 되면서 규칙에서 벗어난 결과도 추론할 수 있게 됐습니다.
- 1. 인공지능: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 (머신러닝,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다)
그렇다면 과연 딥러닝은 어떤 원리로 작동할까요? 딥러닝은 인간의 두뇌가 작동하는 구조를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무수히 많은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죠. 이를 물리적인 형태로 만들어낸다면 아래 그림과 같은 기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다이얼이 달린 거대한 수학 구조물과 비슷합니다. 저 다이얼 하나하나가 두뇌의 뉴런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각각의 다이얼은 원하는 출력값이 되도록 가중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다이얼은 가장 작은 값을 조금 더 높이고, 두 번째 다이얼은 가장 큰 값을 살짝 더 낮추는 식이죠.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다이얼이 달려 있습니다. 이 많은 다이얼은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요?
입력 데이터를 넣고 다이얼을 조절하면서 결과물을 확인한 후, 다시 조금씩 다이얼을 돌려 원하는 결과와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물론 이 작업을 사람이 직접 하진 않습니다. 데이터를 잔뜩 집어넣고 학습을 거쳐 자동으로 조절합니다. 처음에는 다이얼 값을 무작위로 설정하지만 학습을 진행하면서 점점 모든 다이얼이 정답에 가까워지도록 바뀌어갑니다.
모든 데이터가 정답에 가장 가까운 상태를 찾아 더 이상 다이얼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면 비로소 학습이 끝나게 되죠. 이런 과정을 거쳐 모든 데이터가 정답에 가장 가까워지는 최적의 다이얼 위치가 결정됩니다.

(...) 그런데 이 점은 장점이자 단점도 됩니다. 조절할 수 있는 다이얼이 너무 많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몇 번째 다이얼로 인해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간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다며 두뇌를 분해해 무수히 많은 뉴런을 하나하나 조사해봐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인공지능 연구 초기에는 시스템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해석 가능성Interpretability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논리적인 절차를 분석해 결정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는 if-then 규칙 기반 시스템이 대세를 이뤘죠.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연구소장 크리스 비숍Chris Bishop, 1959~ 은 능숙한 엔지니어가 인공지능의 추론 과정을 분석한다 해도 이제 의미 없는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합니다.7 왜냐하면 지금의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규칙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과거에 규칙 기반은 이해가 쉬웠지만 성능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지금처럼 뛰어난 성능을 내기 위해서라면 해석이 어려운 약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죠.
- 1. 인공지능: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 (인공지능의 핵심기술, 딥러닝의 등장)
컴퓨터의 두뇌가 CPU인 것처럼, 게임 그래픽 카드의 두뇌는 GPU입니다. CPU가 성능이 좋은 비싼 코어를 몇 개 장착한 구조라면, GPU는 상대적으로 성능이 떨어지는 저렴한 코어를 엄청나게 많이 꽂아둔 형태입니다. 저렴한 붓을 수천 개 갖고 있는 것과 같죠.
- 1. 인공지능: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 (시스템, GPU가 인공지능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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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벤허 2부로 들어가보자.

벤허 1부는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면, 2부는 그로부터 20년쯤 뒤 어느 유대인과 로마인의 기싸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유다 벤허는, 유대민족 중에서 명망이 있고 또 로마인과도 관계가 괜찮았던 허 가문의 아들이다. 벤허는 어릴 적 친구였던 메살라와 오랜만에 조우하게 되는데, 세속적인 로마인으로 변모해버린 메살라의 모습에 벤허가 크게 실망하게 된다. 오로지 상대방 기분 상할 요량인듯 로마의 우월성과 유대민족의 비천한 상황을 거들먹거리는 메살라에게 벤허는 자존심이 크게 상한다. 여기서 벤허는 로마 (혹은 메살라)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방법은 세속적인 수단 (즉, 군 병력 측면)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고, 이러한 뜻을 모친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모친은 벤허가 세속적인 열망을 거두게끔 부드럽게 타이른다.

벤허 가족의 단란함은 2부 말미에 벌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작가 월리스는 벤허와 그의 어머니, 여동생 티르자, 유모 암라까지 해서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상호간 영혼의 떨림을 어찌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지,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공들여 설명한다.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이 일순간에 깨지는데, 내가 벤허였다면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서 제 구실을 못했을거다.


2부 서문에 적혀 있는 이 시는, 세속적 열망에 사로잡힌 벤허를 그리는 것이었는가.


한가지 주목할 점은, 벤허가 그리던 이상향이 유대민족의 부국강병(?)과 같이 세속적인 열망이었다는 점이다. 메살라에게 긁힌 자존심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나라도 그러한 사고흐름을 따라갔을테다. 하지만 성경 신약을 읽어본 이들은 모두 알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민족의 세속적 독립이 아닌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려오셨다. 2부 마지막에 세속적인 열망을 지닌 벤허와, 영혼 구원의 미션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스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벤허는 나중에 이 장면을 기억하려나.

이쯤하고.. 인상깊었던 구절을 몇 개 가져와봤다.

황제는 아켈라오의 해임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사원의 고위 성직자들의 감정을 해했다. 유대를 시리아의 관할로 강등해 버린 것이다. 시온 산의 헤롯 왕궁은 왕이 없이 2급 관료인 총독이 다스렸고, 그나마도 로마와의 연락은 안디옥의 시리아 특사를 통해야 했다. 게다가 총독은 예루살렘에는 머물지도 않고 가이사랴에 거했다. 하지만 가장 큰 치욕은, 하필 가장 멸시받는 사마리아를 유대와 같은 속주로 묶은 것이었다. 편협한 분리주의자들인 바리새파는 가이사랴의 총독궁 앞에서 그리심 산 신자들에게 밀리고 조롱당하는 게 어찌나 견디기 힘들던지!
- 제2부 제1장 (p.118)

유대민족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주어서 좋았다. 이런 글귀를 읽으니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와 로마의 유대민족 지배가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 깊이 알아보고프다. 왠지 정리해둔 책이나 글이 있을듯.



이 청년의 말투를 글로 정확하기 옮길 수가 없다. 독자의 상상을 믿는 수밖에. 다만 로마인의 특성에서 경건함이 급속도로 사라졌음을, 아니, 경건함을 도리어 고루한 특성으로 여겼음을 지적해야 겠다. 옛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시피 되었고, 기껏해야 사고방식과 표현방식의 표현에 그치게 되었다. 사원 근무가 이득이라는 것을 아는 사제들, 시 구절에 써먹어야 하니까 신을 없애버릴 수 없는 시인들, 혹은 그런 경향이 있는 가수들 정도만 소중히 여겼다. 종교 대신 철학이, 경건함 대신 풍자가 들어섰다.
- 제2부 제2장 (p.124)

벤허야... 네 마음 잘 안다. 하필 메살라 같은 녀석을 친구로 둬서 네가 참 고생이 많다.



"(...) 율법의 어떤 부분들은 때로 불명확하기도 했지만 이 부분은 그렇지 않아. 선생은 직접 아담의 계보를 세 기간으로 추적했단다. 언약부터 성전 건립까지, 거기서 바빌론의 유수까지. 거기서 다시 현재까지. 2기가 끝날 무렵에 딱 한 번 기록이 끊어졌지만, 바빌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스룹바벨이 하느님에 대한 첫 번째 의무로 되살렸어. 그래서 유대인 후손의 계보가 2천년 동안 끊기지 않을 수 있었지."
- 제2부 제4장 (p.148)

구약을 좀 더 꼼꼼히 읽어야 겠다고 느끼는게.. 아직도 성경인물이 헷갈리고, 더러는 선역과 악역마저 혼동되는 민망한 순간이 있다. 스룹바벨도.. 왠지 이름에 '바벨'이 들어가서 괜히 거부감이 들었으나 알고 보니 성전 건축 주역이었던... ㅠㅠ 정진하자.



"(...) 만약 우리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직선과 원을 그릴 거야.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겠어.
'주님은 직선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하게 영원토록 앞으로 나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원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발전이 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의 발자취가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민족의 역사는 다 달라. 다만 그 차이가, 흔히들 말하듯이 원의 면적에, 그러니까 차지한 땅의 넓이에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이 움직여 가는 영역에 있다.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민족이 가장 우월한 거야. (...)"
- 제2부 제5장 (p.152)

벤허를 달래는 모친.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민족이 가장 우월합니다. 아멘.



바리새파와는 달리 사두개파는 예술을 (이교도의 예술까지도) 폭넓게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 제2부 제5장 (p.156)

유대민족 당시 배경설명을 해주어서 좋았다 222



아, 그리고 제2부의 서문은 바이런의 시를 싣고 있는데, 바이런 시를 제대로 접해본 적은 없지만 바이런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을 읽은 바 있지. 바로 내가 애정하는 책, '지적생활의 즐거움' (P.G. 해머튼)에서! 이 토막글을 읽으면서 바이런의 영혼이 열병을 앓았으리라 짐작했는데, 서문에 실린 시를 보니 정말 그랬던 듯 하다.

바이런도 백퍼드와 비슷한 유형의 천재였습니다. 바이런의 가장 아름다운 시들 중 몇 개는 불과 한나절 만에 완성된 작품도 있습니다. 한나절 동안 바이런이 쏟아냈던 집중력은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길어도 하루 이틀이면 세계문학에 길이 남을 명작들이 완성되었습니다. 단순한 재능을 넘어서 그 시들이 완성되기까지 바이런이 감당했던 집중력과 신경과민 상태, 흥분, 절망은 육체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른 상상력이 출발점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에게 잠시의 이완이 더해졌더라면 바이런은 조금 더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책 '지적생활의 즐거움' 중 '다시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









벤허를 읽고 있다.

4부 끝자락까지 읽었는데, 평소에 갖고 다니면서 읽으면 좋으련만 은근 벽돌책이라서 아침에 짬내서 진도 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더스토리가 펴낸 국문본을 펼쳐 들었는데 서두에 등장인물, 당시 이스라엘 상황, 예루살렘 지도 등이 나와 있어서 맥락을 잡기 쉬웠다.

나는 특히나 역사나 상식에 무지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면을 할애하여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감사하다.



각 챕터별로 서문이 저렇게 실려 있곤 하던데, 원서에도 저렇게 실려 있으려나?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원서도 시도해볼까 고민 중이다.  

실낙원으로만 알고 있던 존 밀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노래하는 시를 썼던 모양이다.



여기서 내 가련한 기억력을 고백해야 겠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 '벤허'의 초입부에 대한 것이다. 영화 '벤허'가 고전명작이라는 말을 듣고 수년 전에 영화를 찾아보았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몇분 보지 못하고 인내심이 바닥 나 중도 하차하게 되었는데, 나는 여지껏 그 이유가  영화가 (뜬금없이) 메살라와 벤허가 말다툼하는 장면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지금 영화 '벤허' 초입부를 다시 보니 도서 '벤허'와 동일하게 1부 내용(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왜 1부 내용이 영화에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1부 비중이 적어서 그런 착각을 한걸까? 책을 완독하게 되면 영화를 다시 시도해봐야 겠다.

좌우지간.. 다시 책으로 화제 전환을 해보자면, 1부는 두 갈래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한 데 모이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세명의 동방박사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구세주 나신 곳으로 가는 이야기와,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가 성탄 이야기로 매듭을 짓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 유다 벤허의 이야기는 아는 바가 없으니, 책의 도입부서부터 익히 알고 있던 성탄 이야기가 나와 편안했다. 1부에서 얻은 자신감과 추진력으로 2부까지 순항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동방박사 3인이 각각 이집트, 그리스, 인도 사람으로, 죄다 다른 나라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리스도 나심이 이스라엘 민족 뿐만이 아닌 이방 민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음을 예표하는 일일지? 많은 궁금증을 남기며 2부로 흘러간다.


(...) 걸음을 멈출 기미가 통 없으니, 나그네의 처신이 갈수록 이상해 보였다.
사막을 놀이터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은 것들의 뼈가 산산이 흩어진 길을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다. 샘에서 샘까지, 초지에서 초지까지. 아무리 노련한 족장이라도 홀로 길을 벗어나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러니 지금 이 여행자도 재미를 찾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도망자의 태도도 아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으니까. 그럴 때 휘둘리는 두려움과 호기심의 감정도 나그네에게 없었다. 사람은 쓸쓸하면 동행에게 마음이 약해져서 개를 동지 삼고 말도 친구 삼는다. 개나 말을 쓰다듬고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게 창피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낙타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손길 한 번, 말 한 마디 없었다.
- 제1부 제1장 (p.22)
"그들은 올 거야. 나를 이끈 분께서 그들도 이끌고 계시니. 난 준비나 해 둬야겠어."
- 제1부 제2장 (p.25)
"(...) 하지만 나는 소망을 꺾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신이 사랑과 은혜를 한곳에만, 한 집안에만 주었을까요? 나는 간절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유대인의 자만심을 뚫고 들어가서 알아냈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진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선택된 종에 불과하고, 마침내 온 세상이 그 소식을 알고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
- 제1부 제3장 (p.32)
"하지만 가축들은 어쩌고!"
"주님이 보살펴 주실 거야. 서두르세."
목자들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 제1부 제11장 (p.89)


인공지능에 대한 압박감을 이래저래 느끼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둘러싼 호들갑은 8할이 유튜브 피드가 차지하고 있고, 실상 현실에서는 그 압박감이 드문드문 오고 있다. 비즈니스 미팅을 다녀오고 난 뒤 조바심을 느꼈는지 경영진 측에서 '생성형 AI로 뭐라도 해봐야 하는거 아니냐'는 메시지를 보내오긴 하지만, 실무자들은 '지금 바빠 죽겠는데  인공지능에 염두를 둘 시간이 없어요', 내지는 '써보니까 별거 없던데요?'라는 입장이다.

아직 오프라인 일터는 (불안한듯) 고요하지만 넷상에서는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어딜 가나 인공지능 타령이다. 인공지능으로 업무 효율성이 향상될거고 거기다 각 전문분야에서 인공지능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테니 꿀이나 빨던 전문직 종사자들이 곧 갈아치워질 것이라며 내심 기대하는 낙관론자들이 있는가 하면, 뉴스 보도와 동영상/그림 편집작업에서부터 인공지능이 한자리씩 꿰차는 현상을 보면서 미래 일자리를 걱정하는 비관론자들도 있다.

나는 비관론에 경도되어 있는 편이고, 인공지능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인공지능이 당신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당신을 대체할 것이다.'라는 말로 비관론자들을 찍어누르곤 하는데, 어차피 인공지능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또한 인공지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대체되거나 소모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거기다 옹호론자들은 '아직은 걱정할 때가 아니다'는 식의 메시지도 던지곤 하는데, 그말인즉슨 언젠가는 걱정할 일이 생긴다는 뜻 아닌가? 뭐 이런 무책임한 말이 다 있는지.

과거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가 있을 때마다, 창의적인 예술활동은 인간 고유의 것이므로 예술가들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안심을 한 결과, 오늘날 우리는 ChatGPT가 소설플롯을 써주고, 미드저니가 그림을 그려주고, 또 최근에는 오픈AI가 출시한 '소라'가 말도 안 되는 퀄리티의 영상을 뽑아대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내 입장은 이러하다. 하이테크 분야에서나 거론되던 인공지능이 서서히 일상을 침범하는 현실이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고작 내가 인공지능의 발전을 반대한다고 거대기업들이
그만둘 리는 없으니, 인공지능을 알아는 둬야 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뭘 알아야 다음 수를 두지.

첫 책으로 <챗GPT가 쏘아올린 신직업 프롬프트 엔지니어>를 골랐다. 밀리의 서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책 또한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낙관론을 펼치고 있지만, 저자와 가치관 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일단 기술적/방법론적인 내용만 뽑아가보자.



 

OpenAI는 주로 다른 자동차 회사에 엔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Jasper나 Copay.ai, Rytr와 같은 서비스는 모두 OpenAI가 개발한 GPT-3 모델을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쉽게 말해 엔진을 개발하던 회사가 자동차를 만들었으니, 더 값싸고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할 수밖에요. (실제로 챗GPT의 출시 이후 Jasper가 심각한 매출 하락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 '챗GPT는 하나의 자동차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생성 AI의 핵심은 ‘정보를 찾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챗GPT는 텍스트를 생성하는 생성 AI입니다. 인간의 질문이나 요구에 알맞은 대답을 문장으로 생성해내는 방식이지요. 저희는 챗GPT를 이용하며 ‘인공지능과 대화를 한다’라는 느낌을 받지만, 사실 인공지능의 입장에서는 ‘통계적으로 적절한 문장을 생성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 '생성 AI, 창작하는 인공지능'
사실 자연어 기반 생성 AI가 정보를 찾아내는 것은 학습된 데이터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면서 부수적으로 얻어진 능력, 그러니까 ‘부작용’입니다. 오히려 챗GPT는 정보를 찾는 것보다 보고서나 기획서, 스토리 작성과 같은 창작에 더 강점을 보입니다. 정보를 물어보면 ‘거짓된 정보’를 ‘생성’할 때가 훨씬 많죠.
- '생성 AI, 창작하는 인공지능'
YuGPT라는 사이트 간판을 걸어놨을지언정, 정작 서비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며, ‘어떤 학교의 챗봇인지’는 더더욱 모르는 깡통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발자는 후자를 위해 ‘파인튜닝(미세 조정)’이라고 불리는 학습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영남대학교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지요. 또, 전자를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바로 ‘사전 프롬프트 입력’을 해야 합니다. 미리 이용자들이 볼 수 없는 시스템 영역에 GPT를 향한 지시문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 '서비스를 위한 프롬프트 엔지니어'
그리고, 사전에 입력해둔 프롬프트의 길이에 따라 모델의 비용 청구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적고 품질 높은 프롬프트를 이용해 최상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죠. 이것 역시 역량 있는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 '서비스를 위한 프롬프트 엔지니어'
하지만, 코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다면 더 유능한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될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경쟁력을 갖추려면 코딩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 대한 오해들'
크리스티안은 좋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위해서는 간단한 파이썬 프로그래밍 코드를 짜는 것과 같은 실용적이고 기본적인 기술 지식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 말합니다. 남들은 챗GPT 사이트에서 프롬프트를 입력할 동안, 경쟁력 있는 다른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API를 직접 연결해 다양한 엔지니어링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API를 연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코딩 지식이 요구되겠지요. 전문적이고 복잡한 기술을 이해할 필요는 없더라도, 최소한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 더 좋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할 수 있습니다.
-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갖추어야 할 역량'
수학 계산을 필요로 하는 프롬프트를 개발해야 한다면, 더 고민이 많겠죠. 이때는 Chain of Thoughts를 활용하면 됩니다. 사고 연의 주요 아이디어는 ‘챗GPT에게 추론의 과정들을 유도해 올바른 답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수학 공식과 답을 알려주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반드시 풀이를 적게 하는 거예요. 풀이를 적지 않으면 답을 틀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럼, 챗GPT가 어떻게 풀이를 적도록 하냐고요? 문제를 낼 때 예제를 제시해주면 됩니다.
- '챗GPT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기법'
그렇게 기본 프롬프트를 토대로 여러 수정과 보충을 거치며 프롬프트를 완성해갑니다. 완성도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고 파악이 되면, ‘소나무’ 부분을 변경해봐도 동일하게 강건체 문장을 만들어내는지 파악해야겠지요. ‘소나무’를 ‘스마트폰’으로 바꿨는데 강건체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프롬프트입니다. 

이 경우에는 다시 처음부터 과정을 반복하거나, 프롬프트 안에 ‘소나무’ 키워드와 연관되는 것들이 있지는 않은지, 오류가 있을 만한 부분이 없는지 재검토해야겠지요. 키워드 변경은 여러 번, 다양한 키워드로 시도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 'GPT 프롬프트를 개발하는 단계'
토큰이란 하나의 단어, 문장을 세분화한 조각을 의미하죠. 국어 시간에 배웠던 ‘형태소’를 떠올리면 됩니다. GPT의 경우, 영어는 주로 단어 중심으로, 한글은 자소 단위로 토큰을 분리하죠. 
(...)
GPT는 이렇게 나뉜 토큰을 숫자(벡터)의 나열로 변환(인코딩)해 처리합니다. 생성한 것을 출력할 때는 숫자에서 문자로 변환하는 과정(디코딩)을 거치지요.
- 'GPT 모델 이해하기'
챗GPT를 두고 흔히 하는 오해는 ‘사람이 입력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인터넷에서 찾아 그대로 출력한다’는 것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학습한 것은 사실이나, 답변을 생성할 때 이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없습니다. 토큰화되어 있는 말뭉치 속에서 확률적으로 옳은 것을 가져오는 것일 뿐이니까요. 

사실 이는 사람이 지식을 학습하고 전달하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희도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통째로 기억해 말하지 않죠. 구절의 중심 내용, 특정한 단어 중심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을 말할 때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 'GPT 모델 이해하기'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것은 인간처럼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파라미터(매개변수)와 가중치의 형태로 나타나죠. 

인공지능의 학습은 입력값에 대응하는 결과가 잘 나오도록하는 최적의 파라미터를 찾는 과정입니다. 모델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파라미터는 계속해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파라미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더 정확한 처리와 성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죠. 하지만 파라미터가 많다고 해서 항상 결과물이 좋다는 보장을 항상 할 수는 없습니다.
- 'GPT 모델 이해하기'
능력 있는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챗GPT 서비스만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픈 AI의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죠. 챗GPT는 오픈 AI가 제공하는 서비스일 뿐, 실제 API 연결, 서비스 제작 등을 위해서는 순수한 모델로의 접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걸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플레이그라운드죠. 쉽게 말해, 오픈 AI의 플레이그라운드는 GPT 모델에 대한 학습과 실험을 위한 노코드 온라인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오픈AI 플레이그라운드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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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영화 '벤허'를 시도했던 적이 있는데, 기억으로는 영화는 메살라와 벤허의 재회 장면부터 시작해서 몰입이 안 되었었다.

책은 예수님 탄생 시점부터 다루고 있어서 훨씬 집중이 잘 되었고, 유다 벤허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자연스러웠다. 700쪽 정도 되는 책인데, 200쪽 조금 넘게 읽었다.

인상깊은 글귀가 있으면 남기겠다.


소전서림에서 구보 전시회를 한다기에 기약에도 없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사다가 몇주간 읽었다.


전시회는 이미 끝났지만 기록 목적으로 팜플렛 사진을 올려봄.


구보는 INFP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분주히 넘겼다. 공연히 거리를 쏘다니며 소소한 헛탕과 소소한 관찰을 하는 모양이, 취준생 시절의 나와 똑닮았다. 약간의 동족혐오를 느꼈다.


신문에 연재할 때 이상이 삽화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구보가 카페에 지내는 강아지에게 업신여김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공감성 수치가 정점에 달했다. 모든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건.. 온갖 카페 손님에게는 애정을 갈구하다가 'Come here', '이리온'하며 손내미는 구보에게는 발작하는 강아지뿐. 읽는 내가 다 상처 받았다.. ㅋㅋ



전시회 한구석엔, (송승언 시인님이) 강아지 관점에서 재해석한 글이 걸려있었다. 구보가 인내심을 가지고 가만히 있었으면 개가 왔을 수도 있겠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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