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상반기 교토여행을 결심하면서 집어든 책이다. 여행에세이에 대한 편견 탓에, 해봤자 범람하는 여행사진 가운데 감성 충만한 문구 대충 몇 줄 집어넣은 작업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책에 작가의 교토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오밀조밀하게 녹아있어서 여행 많이 다니는 친한 언니에게 비밀장소들을 전수받는 기분이었다.
"교토에 다녀왔습니다"는 일상적인 장소 (카페, 식당 등)에 좀 더 집중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임경선 작가는 동네사람들이 즐겨찾는 서점이나 가게 (노포)와 같은 일상적인 공간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면서 교토의 정서를 묘사하고 싶었던 듯 하다.
교토의 노포에선 무조건 손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을 대등하게 여긴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만들고 파는 제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노포의 현관문을 열거나 노렌(천 장막)을 걷고 들어갈 때 먼저 말을 거는 쪽은 가게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들어가도 될까요?”
이렇게 손님이 먼저 가게 안쪽의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입장하는 것이 교토의 예절이다. 인사 없이 불쑥 들어갈 경우 손님이 아닌 침입자로 취급된다. 자부심이 있는 노포 주인들은 손님에게도 인성과 기본 매너를 암묵적으로 기대한다. 그것은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장사가 아닌 인간 대 인간, 면 대 면으로 가치를 주고받는 진중한 행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윤 추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때로는 돈을 버는 일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Chapter ‘3. 세월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아, 물론 일반적으로 추천하는 명소도 안내하긴 한다. 철학자의 길 같이 한두번쯤 들어봤을 명소는 주로 부록 ('임경선의 교토')에 수록되어 있다. 기본적인 정보는 얻을 수 있으니 부록만 읽어도 여행일정 짜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부록에 언급된 장소 중에서는 오코치산소가 고즈넉하니 좋았다. 동행한 친구도 차분한 분위기에 매료된 눈치였더랬지.
교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작가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문장들.
가모강을 유명하게 해준 트레이드마크는 강기슭에 같은 간격 (약 2미터)을 주욱 앉아 있는 커플들의 풍경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규칙을 지켜가면서 연인들은 사랑을 속삭인다.
-Chapter '9. 가모강과 사람들'
교토에는 경관 조례법이 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간판 색깔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브랜드 이름의 글자 색상은 흰색, 검정색, 갈색 외에는 접수가 되지 않고 특히 선정적인 느낌의 빨간색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또한 교토의 특정 거리는 건물 높이도 20미터까지로 제한되어 있다.
-Chapter '8. 풍경을 위해서라면'
단순히 교토 거리를 거닐 뿐인데도 지인피셜을 비밀스럽게 제공받은 것 마냥 뿌듯했다. 내가 아는 언니가 가모강에 커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고 간판이 사뭇 심심할거라고 했는데, 진짜네. 뭐 이런 느낌이었달까. 임경선 작가의 시선을 통해 여행한 교토는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아 참, "7년의 밤"에서 겪었던 이북리더기의 문제가 이번 책에서도 발생하는데, 그것은 사진들이 축소된 회색조 이미지로 나온다는 것. 여행에세이집에 사진이 넘쳐난다는 장르적 문제와, 사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왕 찍었으면 보여야 할 것 아니냐. 확실히 크레마카르타는 여행에세이를 담는 기기로서는 부적합한 것 같다. 갤럭시탭은 그래도 컬러로 나오기 때문에 전자책을 이미 구매하신 분이라면 태블릿PC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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