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단순한 거야. 공을 던지고, 공을 치고, 공을 받고. 타자가 타석에 들어오면 투수는 공을 던져야 하는 걸세. 포수는 승부구를 요구해야 하고. 7년 전, 그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할 공이었지만 이젠 아냐. 내 배터리야. 내가 사인을 보내고 서원이가 던지는 거야. 내 사인을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그건 그 아이의 선택이지. 하지만 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네야. 그 아이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게." 

-Chapter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행지에서 가볍게 읽을 만할 책으로 여겨 들고 갔는데 오산이었다. 여행 그 자체보다 책의 줄거리가 더 무겁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난독증을 자처하는 나에게는 이 소설이 쉽지 않았다. 소설이 액자식 구성인데다가 시간순으로 줄거리가 전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살인범이 누구인지 꽤 일찍 밝혀진 까닭에 초반부터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스릴러물이 벌써부터 답을 내놓아도 되는 것인가? 이 책은 범법자를 초반부에 까발리고 범법자의 향후 심리묘사를 그리는 데 치중할 제 2의 '죄와 벌'이 될 뿐인가? 여러 의문점이 생겼지만, 문체 자체가 흡입력이 있는데다가 야구, 잠수 등 전문 분야를 설명하는 작가의 필치가 탁월해서 내려놓기 쉽지 않았다. 

이 책은 단순한 '죄와 벌' 리메이크작이 아니라는 것을 중후반부에 다다라서야 깨달았다.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남은 쪽수 동안 그저 양심의 가책과 자기정당화 사이에서 번민했던 라스콜리니코프와 달리, '7년의 밤'의 살인범에게는 사건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수의 감정선에 대한 탁월한 묘사 이외에도, 영제의 복수극을 비롯한 향후 행보,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게 된 서원이 취하게 될 태도 등이 미결로 남아 있으니, 독자는 남은 천릿길을 기꺼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차피 독자는 범인을 내심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범인에 대한 징벌은 독자를 만족시키기는 커녕 분통을 터뜨리게 할 것이다.  

참, 더 말하고 싶은데 스릴러물이라 까발리기도 그렇고. 결론은 재미있습니다. 최근 읽은 소설이 3권 (편혜영의 '더홀', 클레어 맥킨토시의 '너를 놓아줄게')이 공교롭게도 모두 못된 남편을 반동인물로 설정하고 있었는데, 그 3권 중에서 '7년의 밤'에 나오는 남편 캐릭터가 가장 현실성이 있었다. 정유정 작가님은 싸이코패스 수십명과 내밀한 면담이라도 하셨는지. 

 

처음엔 그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여겼습니다. 나중에야, '자기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그에게 아내와 아이는 '자기 것'의 핵입니다. 자신이 정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과 통제력을 확인하는 대상, 자신이 주는 것만 받고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주는 존재,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손가락과 발가락입니다. 그것이 흔들린다는 건, 자기세계의 핵심이 손상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남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로 손상당했을 때, 남편이 어떻게 할지는 상상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Chapter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7년의 밤'은 크레마로 읽었는데, 전자책 단말기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지도가 크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다. 서점 가서 실물 책을 보니까 두 페이지 가량을 지도가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크레마는 반쪽 정도 차지한다. 작가가 텍스트로 이미 세령마을의 지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종이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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