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책읽기를 썩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엔가에는 (읽으라는 교과서는 안 읽고) 쉬는시간부터 붙들고 있던 이야기책을 중단할 수가 없어 교과서 사이에 숨겨두고 읽다가, 같은 분단 학우들이 나를 고해바쳐서 교실 뒤편에 서있는 수치를 당하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미국에 잠시 머무를 적에는 도서관에 갖은 책을 빌려와서 닥치는 대로 읽은 탓에 Reading Count 고득점랭킹에 올랐다고 상도 받았었고. 중학생 시절에도 책은 계속 읽었던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해리포터 시리즈 등등이 기억에 남는 걸 보니.
독서량이 확연히 감소한 것은 고등학교 진학 이후부터였는데, 쟁쟁한 아이들 사이에서 내신 따느라 배움이 즐거움이 아닌 스트레스로 변모해버린 지 오래였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나는 보상심리로 영상시청에 탐닉했었다. 그때는 PMP로 인강 듣던 시절이어서 별의별 영화와 시리즈물을 COWON PMP에 담아두고 다녔었다. 그전에는 책을 보면 설레곤 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이상하게 책을 보면 마음에 부담이 갔었다. 아무래도 책마저도 나의 지적수준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탓에, 책마저도 있어보이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나보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 고등학교 시절 풍경을 생각해보면 학우들이 보통 두가지 케이스 중 하나에 해당되었다 - 아예 책을 안 읽고 내신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어려운 책을 읽거나 (지금도 기억난다. 고등학생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빈 서판'을 웹소설 읽듯 읽던 친구들이..).
우여곡절 끝에 진학한 대학교에서도 그놈의 지적허영심이 고개 숙일 줄을 몰라서, 도서관에서 수준에 맞지도 않는 어려운 책들을 잔뜩 빌려오고 몇장 들춰보지도 않은 채 반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금만 더 스스로에게 솔직했더라면, 내가 별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책을 만났을텐데.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인건가.
대학교 시절도 허덕이며 보내고 어찌저찌 취업한 직장에서도 책에 대한 허영심은 사라질 줄 몰랐다. 슬슬 돈을 벌기 시작해 있어보이는 책들을 잔뜩 사들였지만 신용카드를 긁는 순간 흥미는 빠르게 식었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고 유리책장에 고이 모셔둔 책들이 늘어만 갔다. 시간이 나면 책을 보겠지 - 생각했지만, 나는 (도파민에) 매우 예민한 사람으로서 시간이 나는 족족 유튜브를 보곤 했다. 한 책을 집어들면 다른 책이 더 가치있을까봐 걱정되어서 그나마 집어든 책을 내려놓았다. 그런 인생을 수년에 걸쳐 반복했고, 스크류테이프의 편지도 그 탓에 몇년에 걸쳐 겨우 완독했다.
몇년간 낑낑댄 결과, (비로소 드디어) 책을 (거의) 매일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굉장히 충만하고 뿌듯한 기분이다. 책을 읽으니 말과 글에 힘이 생기는 걸 느낀다. 잠시나마 어휘력이 풍부해지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겨서인 것 아닐까 싶다. 물론 독서근육이 빠질대로 빠진 상황이라, 독서를 게을리 하면 바로 타격이 올게다.
계속 읽어야지.
유튜브 영상이나 인터넷 커뮤를 보면, 독서하지 않아도 충분히 정보를 취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더러 말들 한다. 나 또한 그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보를 더 많이 얻으려고;;;) 더욱더 유튜브에 빠져들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영상으로 얻는 정보와 독서를 통해 얻는 정보는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다. 영상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꺼버린다. 그래서 쇼츠나 릴스 형식의 컨텐츠가 성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를 만족시켜봐.. 철저한 관람객의 자세.. 하지만 독서는 어떤 활동을 수반하는가? 밑줄을 치기도 하고 사전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저 까만 활자의 모음에서 인물의 옷차림이나 자연풍광을 상상해내곤 한다. 인간의 능력이 이토록 놀랍지 않은가? (텍스트 파일로 치면 kb 단위 분량일) 종이 몇장에서, (동영상으로 치면) 몇백 MB 내지는 몇 GB에 달하는 데이터를 추출해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경이롭지 않은가? 인간의 인내심, 상상력, 이해력 등등 온갖 능동적인 정신활동이 관여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스포츠 활동이다.
재미있고 보람이 있으니 계속 읽는 버릇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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