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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모든 단편집이 이렇게 나왔으면 | 《소설 보다 : 겨울 2023》, 김기태, 성해나, 예소연 著

by 한낱점 2025. 10. 5.

 

 

회사 동료 선생님이 빌려주신 덕분에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를 처음으로 읽어보게 되었다. 단편집을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또 좋아라 하는 편도 아니어서, 큰 기대는 없었건만 웬걸, 여기 핫한 작가들 작품이 잔뜩 실려 있잖아? 여러 북튜버 채널을 통해 예소연 성해나 김기태라는 이름을 몇번이고 접했던터라 바로 펼쳐보았다.

'소설 보다' 시리즈의 또다른 매력은 작품마다 실려 있는 작가와의 대담문이었다. 물론 몇페이지 남짓한 질답으로 모든 궁금증이 해소되는건 아니었지만 연계되는 다른 작품을 알게 되고 작가의 당시 근황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꽤 컸다. 단편집을 안 좋아하는 주변 지인들이 더러 있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하나 짧은 분량으로 인해 스스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단편소설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이렇게 작품 뒤에 대담문이 실린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단편집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김기태 작가의 <보편 교양>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서사의 박진감은 단연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가 일품이지만,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유혈낭자한 장면에 스트레스 받았다. 그보다는 (딱히 별일이 없는 것 같지만) 생각이 많고 마음이 복잡한 주인공 곽의 내면세계를 지켜보는 편이 여러모로 평화로웠다. 직업인/지성인/딜레탕트로서 조용히 속앓이 하는 주인공 곽의 모습에서, 언뜻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가 연상되기도 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김기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는 것으로..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머그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 <보편 교양> (김기태 著), p.12

 

곽은 그 낯설고 활기찬 감정에 반항심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았다. 명백한 수업권 침해였다. 수강생들이 수업을 외면할 수는 있지만, 누가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라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지시할 수는 없었다. 이 민원은 나의 불가침한 권리를 파괴하려는 시도 아닌가. 게다가 학생이 까다로운 『자본론』에 관심을 보였다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보호하고 독려해야 할 지적 호기심이 있지 않나. 자신은 물론 학생의 권리를, 나아가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는 민원이라 생각하자 반항심을 더 정당하다 여길 수 있었다. 삶에서 한번은 맞닥뜨릴 거래 예감한, 파괴될지언정 패배해서는 안 되는 시험이 먼 길을 돌아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 <보편 교양> (김기태 著), p.27~p.28

 

자기야,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기회 아니다? 내 앞으로 줄 선 무당들 다 제치고 자기한테 먼저 연락한거야.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 보현의 은근한 열등감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안다. 평생 질투해온 나를 서서히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저놈의 비열함. (...)

- <혼모노> (성해나 著), p.72

 

(...) 노크 소리는 지겹도록 이어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엄마가 서 있었다. 밥 먹어. 그렇게만 말하고 엄마는 돌아갔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식탁 앞에 앉았다. 나와 엄마는 아빠가 먹기 전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따금 아빠는 일부러 꾸물거리곤 했는데,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미운 나머지 견딜 수가 없었다. (...)

- <우리는 계절마다> (예소연 著),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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