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읽으면서 애매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주인공 커플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가늠해보고자 수제(지명)을 열심히 구글링해보았으나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지역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긴 하나) 화자 아이다의 편지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아 시대적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다와 자비에르가 정확히 어떤 무브먼트/사상에 동조하여 어떤 세력과 싸우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대충 신자유주의 & 세계화 & 자본주의 세력과 싸우는 줄은 알겠다만 말이다.
아이다와 자비에르를 둘러싼 상황 사실관계가 배경에 놓여 있어 흐릿하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 배경을 아무리 zoom-in 해도 여전히 해상도는 흐릿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다의 감정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다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2000년대의 한국으로 회귀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조건에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연애관계가 횡횡한 2020년대가 아닌, '사랑의 바보' 노래가사가 흘러나오고 방해물(ex. 불치병/집안차이)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랑이 단골 드라마 소재로 쓰이곤 했던 2000년대 말이다. 이중종신형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도 수감된 연인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고 그와의 결혼 요청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CAP 10B를 타고 자비에르와 함께 수직낙하하는 초월적인 경험을 했던 아이다는, 사랑이란 시간에 얽매이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게 아닐지. 시간에 종속되는 '감정, 욕정, 욕망'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구속되기를 자처하는 '의리'가 '사랑'이라는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왜 눈물이 났던 걸까. 의자를 고치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머지 일들은 너무 어려워서? 아니면 이젠 의자 고치는 일 같은 걸 당신에게 부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 '첫번째 편지 뭉치'
그들은 우리가 다음으로 기획하고 있는 일을 예측할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다. 그들이 우리를 몰아넣은 침묵의 지대를 그들은 건널 수 없다. 그들 쪽에서 보면 그 경계에는 그들이 우리에게 덮어씌운 잘못된 비난들이 내는 소음이 있고, 우리 쪽에서 보면 그 경계에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침묵의 마지막 기획이 있다.
- '첫번째 편지 뭉치'
신경생물학자들이 리간드라는 천사들을 발견하면서 정신에 대한 우리의 추측에 변화가 생겼어요. 뿐만 아니라 정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 자연 사이의 관계도 변했죠. 육체는 비물질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의 지휘를 받는 물리적인 기계라는 견해는 이제 끝났어요. 그건 사 세기 동안만 유효했을 뿐이죠.
- '세번째 편지 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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