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서평] 지적 생활의 즐거움, P.G. 해머튼 (공부왕찐천재, 수험생활에 대한 소고)

한낱점 2021. 3. 7. 23:56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장 12절

 

 

 

 

우리를 지적으로 만드는 힘은 배운 지식과 익힌 교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단면들을 스스로 발견해내려는 노력과 인간답게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하려는 타고난 본성일 뿐입니다. 지적 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삶의 진리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진리와 작은 진리 사이에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정의와 개인의 생활 사이에서 늘 꿋꿋하고 당당하게 고귀한 쪽을 선택해나가는 것입니다. 

-Chapter "서문"


중학생 시절, 나는 시험공부가 어렵다며 종종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칭얼대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화이팅 넘치는 동기부여 멘트 대신 당신 곁에 나를 앉히고 교과서를 같이 읽어주셨다. 한줄한줄 읽을 때마다 어머니는 문장을 곱씹기도 하고, 그 배경과 행간의 의미를 유추해보기도 하고, 모르는 개념이 나오면 백과사전 등 참고도서를 같이 찾아보기도 했다. 한 문단 정도 그렇게 읽고 나면 어머니는 뿌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재밌지 않니?"

 

재미있지 않냐니- 당장 내일모레 중간고사에서 시험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굉장히 인상깊은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공부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아서 혼난 적은 있어도, 시험점수가 형편없다고 어머니에게 야단맞은 적은 별로 없었다.

 

좌우지간 어머니와의 이런 기억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정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책을 사모은다.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당장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배움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허투로 흘려보낼 문장/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념 이해에 결국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 간혹가다 수수께끼가 풀리는 귀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면 예의 그 말이 재생된다: "재미있지 않니?"


유감스럽게도 익혀야 될 지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 정해진 기준은 없습니다. 지금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데, 가장 합리적인 기준은 알고 싶다, 궁금하다고 느꼈던 기분입니다. 그 기분을 순수하게 믿어야 됩니다. 만일 당신이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 생겼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런 기분도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그나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왜곡된 의견보다는 낫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 간혹 의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문으로 그쳐야 되는데 의문이 확신이 될 때까지 추구하다보면 정작 관심을 가져야 될 것들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Chapter "배움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2020/04/04 - [도서] - '지적 생활의 즐거움'을 다시 꺼냈다

 

이전 포스팅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점수 따는 법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배움 예찬서'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방법론을 논하는 책 (이하 "자기계발서")과는 오히려 상반되는 주제의식을 가졌다고도 느껴진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짧은 시간에 최대의 효과 (점수, 자격증 등)를 낼 수 있는 방법을 논하다보니 학습내용 마저도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이 과목은 과락을 면하는 정도만 공부하자, 이 부분은 시험에 거의 나오지 않으니 넘어가자,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니 이렇게 일단 외워두자 - 뭐, 주로 이런 문장들이었다. 한때 이런 단호한 말들에 혹해서 경주마 처럼 앞만 보고 달렸는데 지금 보면 나와 영 맞지 않는 조언이었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 Chapter "가난한 지식인에게"


반면 '지적 생활의 즐거움'은 독자에게 잠시 멈춰서서 생각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스스로의 궁금증을 존중해주고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본인이 직접 찾아가도록 용기를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당신 자녀보다도 중간고사 공부에 재미를 느끼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사회가 알아주는 자격증, 점수를 얻어내기 위해 남들이 알려주는 지름길을 무작정 가기 보다는, 내 지적세계를 스스로 세워나가게끔 도움을 준 어머니와 이 책에 감사를 표한다. 


당신의 조부는 지적 생활 앞에서 절박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몰라서 초조해진다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두려움을 모르고 사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분은 매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쫓기는 사냥감의 심정으로 지식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식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이 찌듯 그분은 즐기듯 지적 영역을 탐구했고,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감에 따라 지성인으로서 발자취가 확대되었습니다.

당신의 조부는 자신이 지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타인과의 비교로 불행한 압박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분은 고대 로마인처럼 라틴어를 아름답게 구사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라틴어 실력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조부가 고대 로마인을 만나 그가 하는 말을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분은 당대 라틴어 전문가들과 비교해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셨으나,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라틴어는 지적 즐거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조부께서는 누군가와 경쟁하려고 서재에 틀어박혔던 게 아닙니다. 세상의 강요로 서재에 갇혔던 것도 아닙니다. 고대 로마의 저술과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책을 읽었고 라틴어를 공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조부는 철저히 혼자였으나 외롭지 않았습니다. 책장에 남아 있는 위대한 지식인들의 생명이 치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Chapter "여러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고 집착하는 친구에게"


번외로, 얼마전 홍진경이 '공부왕찐천재 홍진경'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기에 영상을 몇개 봤는데 굉장히 고무적이었다. 딸이 질문할 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공부 채널을 개설하는 데 제일 큰 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녀의 교육만이 걱정이었다면 비싼 과외선생님 붙여줘도 됐을텐데, 홍진경 본인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꽤 컸던 것 같다. 그 갈증이 있음을 선언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이 멋있다. 

 

 

응원합니다 홍진경님.


마음이 성실한 자에겐 보상의 시기가 반드시 찾아오는 법입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약속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실망은 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때 인생은 더 많은 노력을 선물로 베풀어줍니다.

당신 인생에 함부로 명령을 내리지 마십시오. 당신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미소로 승리하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반항하십시오. 그리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남에게 명령할 때는 웃는 낯으로 하십시오. 웃음은 칼보다 강합니다.

-Chapter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지식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