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평) ⟪나 같은 기계들⟫, 이언 매큐언 著
어느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정도서가 있는 모임이 아니고, 각자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자유롭게 나누는 자리였는데, 여기서 참여자 한 분이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을 소개해주셨다.
앨런 튜링이 단명하지 않고 과학적 성취를 지속하였다면,
인공지능과 로봇이 1980년대를 살아가는 한 영국인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
대체역사물(alternate history)이구나. 소재를 듣자마자 나는 흥미가 일었지만 막상 소개해주신 분은 손사래를 쳤다. 생각의 흐름 기법이 과중한 나머지, 이론과 과학개념이 난무하여 자기는 읽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AI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꽤나 재미없었던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도 완독한 마당에 뭔들 못 읽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2024.04.08 - [Books] - (읽는 中 - 1장)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챗GPT 수록 개정판)>, 박상길 지음 / 정진호 그림
어찌되었건 그런 마음에 이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고,
비록 초반 스타트가 다소 더뎠지만,
주인공의 연인인 미란다의 수상한 과거와 인조인간 아담의 예측불가능한 행동에 페이지를 바쁘게 넘기게 되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인공지능에 관해 내가 한번이라도 접했던 기술적/사회적/문화적 논의가 모두 이 한권의 소설에 응축되어 있다는 데서 감탄했다. 이언 매큐언은 말만 많이 들었지 이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뛰어난 스토리텔러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소설은 얼마나 더 재미있게 잘 썼기에 '⟪나 같은 기계들⟫이 매큐언 기존 작품 대비 별로'라는 리뷰가 있었던 걸까. ⟪속죄⟫나 ⟪암스테르담⟫을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
그것은 희망이 허락된 종교적 열망, 과학의 성배였다. 우리의 야망은 높고 낮게 흘렀다 - 창조신화의 실현을 위해서, 기괴한 자기애적 행위를 향해서. 그것이 실현 가능해지자 우리는 결과야 어떻든 욕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고결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목표는 완벽한 자신을 통해 필멸성에서벗어나 신에게 맞서거나 심지어 신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보다 실용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개선된 형태의 더 현대적인 자신을 고안하여 발명의 기쁨, 지배의 전율을 만끽할 작정이었다.
- Chapter 1 (p.11)
넬슨 기념비 근처 시위에서 쓰레기통과 빈 깡통으로 만든 조잡한 로봇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기조연설자 벤이 연단에서 그걸 가리키며 러다이트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대중에게 선진 기계화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일자리는 더이상 보호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역동적이고 창의적이며 세계화된 경제에서 평생일자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야유와 느린 박수가 터져나왔다. 대중의 다수가 그의 다음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의 유연성은 보장과 결합되어야 한다 - 모두를 위해.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건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자의 복지다. 인프라 투자, 훈련, 고등교육, 보편적 기본소득. 조만간 로봇들이 막대한 경제적 부를 창출해낼 것이다. 그들에게 세금을 매겨야 한다. 노동자는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거나 전멸시키는 기계에 대한 지분을 가져야 한다.
- Chapter 4 (p.178)
그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우리는 그가 쉿쉿거리는 치찰음으로 의미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걸 들었다. 그러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고, 그의 목소리가 먼 단파 라디오방송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미란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솔즈베리에 다녀왔어요. 이 자료 복사본을 경찰에 넘겼으니 연락이 올 겁니다. 난 후회는 없어요. 우리의 생각이 다른게 유감스러울 뿐이죠. 당신이 명료함을…… 깨끗한 양심의 편안함을 환영할 줄 알았는데…… (...)"
- Chapter 9 (p.416-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