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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전서가에서 나온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한낱점 2024. 5. 13. 10:02

소전서가에서 펴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퍼스널컬러는 제주신라호텔이었구나? 연분홍색 표지와 푸른 배경이 사뭇 잘 어울린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펴낼 때 출판사 소전서가가 세심하게 신경 쓴 부분은 표지 디자인뿐만이 아니다. 매 챕터에 이상이 그린 삽화와, 또 맨 뒤에는 '배우신 분들'의 대담을 실었다. 특히 대담이 실려 있는 점이 감동 포인트였는데, 대담을 통해 구보가 경성을 하릴없이 거닐었던 이유, 이 소설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간의 관계성, 이 소설의 디자인적인 측면, 그리고 소설가 박태원과 이상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담'에서 '박태원 그리고 구보의 고현학'을 인상 깊게 읽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는 <모데로노로지오>라고 표현되는 모더놀로지(modernology), 즉 고현학은 '지금의 모습을 그리자!'라는 기치 아래 고고학과 비교되어 나온 용어로, 곤 와지로가 1920년대 관동 대지진 이후 재건되는 도쿄 모습을 기록하기를 주창한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당대를 관찰해보려는 행위인건데, 소설가 박태원과 구보는 글쟁이이니 고현학에 관심이 갈 법하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고현학을 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환경이었고, 그 부분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보여주고 있다.      

그저 나와 비슷한 성향(추정컨대 INFP?)이라 구보가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낸 것으로만 여겼는데,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의 걸음걸이에 녹아있었던 것.

유승환: 저는 이 고현학이라는 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지 작가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현학의 성과를 보여 주는 작품이 아니라, <그게 가능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 삼습니다. 구보 씨가 산책 나갈 때 들고 다니는 아이템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단장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정: 노트.
유승환: 무언가를 봤을 때 노트에 적어야 고현학이죠. 근데 이 작품에서 구보가 고현학을 하기 위해 노트를 펴는 장면이 얼마나 나옵니까? 딱 두 부분이 있어요.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구보가 노트는 계속 들고 다니면서 딱히 뭘 적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유승환 님에 의하면 구보가 노트를 펼치는 두 장면은 아래와 같다.

  1. '젊은 아낙네가, 실수로 떨어뜨린 복숭아가 바세도우씨 병에 걸린 노동자에게까지 이르르자 집어들기를 단념'한 일련의 과정을 구보가 기록하려고 노트를 펼쳤다가 근처의 사복경찰을 목도하고 기록을 포기한다.
  2. 친구와 카페에 가서 여급들과 놀 때 농담 따먹기로 서로의 정신병을 명명할 때 노트를 다시 펴든다. 다시말해 구보는 고현학을 하기 위해 노트를 지참했음에도, 막상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인 것은 밤 카페라는 닫힌 장소에서였음을 유승환 님은 지적한다.


머리가 띵했다. 온종일 이어지던 구보의 실없음에 나는 일견 공감하기도 했지만 한심하게 보기도 했었는데, 사실 구보는 검열과 감시를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견뎌내고 있었구나. 구보가 '명랑을 가장한다'는 문구가 몇번 나왔는데, 검열과 감시가 이루어지는 환경에서는 무해한 시민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 결과가 아니었을지.

유승환: 이곳이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서소문정에 왜 못 갈까?>라는 문제가 일단 하나가 있잖아요. 서소문정이라고 하면 서촌으로 가기 위한 입구입니다. 지금도 시청에서 서소문동을 지나 죽 올라가면 서대문 쪽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오죠. 그렇게 서대문, 소위 서촌으로 죽 가면 마주치는 장소들이 독립문이나 서대문 형무소 같은 곳이죠. 그러니까 사라져 버린 조선, 혹은 조선 독립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들이에요. 그렇다면 거기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는 건에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닐까.
김미영: 검열을 의식한다는 거겠지요.
유승환: 정작 검열이 두렵다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검열 때문에 검열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못하는 거죠. 그 대신 구보는 자기가 신경 쇠약에 걸려서 거기에 가지 못한다고 말해요. 근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이 작품 초반에 구보는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신경 쇠약이라고 해요. 농담이에요.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에요.
사실 검열 때문에 검열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못하는 거죠.


추가적으로, 11장에 본인의 신경쇠약을 의식하는 동시에 옆을 지나쳐가는 건장한 사내에게 위압감을 느끼며, 어릴 적 『 춘향전』을 읽었던 일을 구보가 후회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 춘향전』이 어디가 어때서? 야시꾸리한 내용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그러나?'라고 의심스레 여겼었다. 하지만 대담을 읽으며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승환: (중략) 그러면서 구보는 <그럼 내가 언제부터 이런 신경 쇠약에 걸렸을까?>하며 11화부터 『 춘향전』 이야기를 합니다. 박태원의 다른 산문을 보면 자신의 문학적인 경험의 시작으로서 취학 이전에 『 춘향전』을 탐독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 춘향전』을 읽은 건은 박태원 문학의 출발점이죠. 그런데 박태원은 바로 그 춘향전을 볼 때부터 내가 이미 신경 쇠약에 걸릴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김미정: 작가의 운명.
유승환: 작가는 신경 쇠약이라는 병에 걸리는 존재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식민지 조선에서 문학을 한다는 건 자체가 일종의 공포, 신경 쇠약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되는 공포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구보 씨. 소설가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은 문장인 줄도 모르고..

대담에는 고현학 외에도 시대적 배경과 주변부 사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대담을 읽고나면 확실히, 한 소설가의 밋밋하고 실없던 하루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대담은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그나저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당시 이상이 삽화가로 참여했다는 점이 신기하다.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본래 전공은 건축과인데다가 삽화도 그리다니, 다능인이었구나.

19화, 29화, 30화에 삽화가 빠져 있는데 이상이 그날 개인적인 문제로 그리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포인트.

어머니는 다시 바느질을 하며, 대체, 그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해본다.
하지만, 보통학교만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회사에서 관청에서 일들만 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불 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해도 일자리가 없다는 건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해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 군데라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때, 구보는 차라리 고독에게 몸을 떠맡겨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자기는 고독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꾸며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amp;amp;hellip;
그러나, 여자가 청량리행 전차 속에서 자기를 또 한 번 발견하고, 그리고 자기가 일도 없건만, 오직 여자와의 사이에 어떠한 기회를 엿보기 위해 그 차를 탄 것에 틀림없다는 것을 눈치챌 때, 여자는 그러한 자기를 얼마나 천박하게 생각할까. 그래, 구보가 망설거리는 동안, 전차는 달리고,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면서도 구보는 그 비극에서 자기네들을 구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려 들지 않았다.
결혼 비용 삼천 원. 신혼여행은 동경으로. 관수동에 그들 부처를 위해 개축된 집은 행복을 보장하는 듯싶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거의 일시에 머리를 돌리고 그리고 구보는 그의 고요한 마음속에 음울을 갖는다.
&amp;amp;amp;amp;amp;amp;amp;amp;amp;lt;모데로노로지오&amp;amp;amp;amp;amp;amp;amp;amp;amp;gt;를 게을리하기 이미 오래다.
때마침 옆을 지나는 장년의, 그 정력가형 육체와 탄력 있는 걸음걸이에 구보는, 일종 위압조차 느끼며, 문득 아홉 살 때에 집안 어른의 눈을 기어 『 춘향전』을 읽었던 것을 뉘우친다.
구보는 이 조그만 사건에 문득, 흥미를 느끼고, 그리고 그의 &amp;amp;amp;amp;amp;amp;amp;amp;amp;lt;대학 노트&amp;amp;amp;amp;amp;amp;amp;amp;amp;gt;를 펴들었다. 그러나 그가 문 옆에 기대어 섰는 캡 쓰고 린네르 쓰메에리 양복 입은 사내의, 그 온갖 사람에게 의혹을 갖는 두 눈을 발견하였을 때, 구보는 또다시 우울 속에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황금을 찾아, 황금을 찾아, 그것도 역시 숨김없는 인생의, 분명히, 일면이다. 그것은 적어도, 한 손에 단장과 또 한 손에 공책을 들고, 목적 없이 거리로 나온 자기보다는 좀 더 진실한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자에게 쉽사리 미소를 보여주었다고 새삼스러이 여자의 값어치를 깎을 필요는 없었다.
「이리 온.」 그러나 강아지는 먼젓번 동작을 또 한 번 되풀이하였을 따름, 이번에는 입을 벌려 하품 비슷한 짓을 하고, 아주 눈까지 감는다.
사실, 그는, 지금 벗을 가진 몸의 다행함을 느낀다.
구보는 그저 『 율리시스』를 논하고 있는 벗을 깨닫고, 불쑥, 그야 &amp;amp;amp;amp;amp;amp;lt;제임스 조이스&amp;amp;amp;amp;amp;amp;gt;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 게지. 그러나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할 까닭이야 없지.
그들의 세상살이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속으로 지난날의 조그만 로맨스를 좀 더 이어 생각하려 한다.
그는 여자가 기독교 신자인 경우에는 제 자신 목사의 졸음 오는 설교를 들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공원 안을 그들은 생각에 잠겨, 생각에 울어,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 헤매 돌았다.
구보는 대체 무슨 권리를 가져 여자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농락하였나.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게도 단순하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따랐다.
문득, 제비와 같이 경쾌하게 전보 배달의 자전거가 지나간다. 그의 허리에 찬 조그만 가방 속에 어떠한 인생이 압축되어 있을 것인고.
구보는 자기가 이러한 사내와 접촉을 가지게 된 것에 지극한 불쾌를 느끼며, 경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와 사이에 간격을 두기로 하였다.
어느 틈엔가 종로에까지 다시 돌아와, 구보는 갑자기 손에 든 단장과 대학 노트의 무게를 느끼며 벗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구보는 온갖 사람을 모두 정신병자라 관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럼 이 세상에서 정신병자 아닌 사람은 선생님 한 분이겠군요.
그 맑은 두 눈은 그의 두 뺨의 웃음우물은 아직 오탁에 물들지 않았다.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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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2 - [도서] - (#1)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