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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한낱점 2021. 9. 14. 00:43


누군가가 나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그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줄로만 알았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다. ('1장')

물론 나를 돌봐주는 대가로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있긴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4장')

젊은 의사는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나타났다. 로자 아줌마는 입에 거품을 물고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젊은 의사는 열 살짜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긴 뭐하는 곳이냐? 유치원 같은 데냐?” 젊은 의사는 이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르 마우트는 바닥에 주저앉아 질질 짜고 있었다. 로자 아줌마의 엉덩이에 다 쏟아버린 그의 행복이 억울해서였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이 노부인에게 헤로인을 주사한 거야?”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그를 바라보면서 말없이 미소를 보냈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겨우 서른밖에 안 된 그 젊은 친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 풋내기인 것을. ('10장')



이건 그냥 내 느낌인데 미국문학은 진취적이고 직선적인 맛이 있다. 주인공이 잠깐 멈춰서 고뇌하는 단계도 있지만 그건 언제나 다음 진도를 빼기 위한 디딤돌이라는 느낌. 그 때문에 스토리 전개가 시원하다.

반면, 이것도 그냥 내 느낌인데, 프랑스 문학이나 영화는 인생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는 구석이 있다. 질리지도 않는지 인생과 그 안에 있는 고통, 즐거움, 슬픔을 계속해서 관조하고 관찰한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 예술이 도돌이표 예술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이 책을 읽는 중반까지도 로자 아줌마가 죽은 이후의 모모 이야기가 계속 진행될 줄로만 알았다. 예상과 달리, 이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두고 뱅뱅 돈다. 도무지 그 구심점에서 뻗어나갈 생각을 않는 바람에, 나는 로자 아줌마를 힘겹게 떠나보내는 모모의 곁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곁을 지킨 그 끝에는 큰 보상이 있었는데, 이 열네살 짜리 꼬마는 결국 "사랑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일어서주었다.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바닥에서, 그저 숨이 붙어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통스럽게 몸부림 쳐야 할 때가 있다. 이러한 딱한 인생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작가가 있듯이. 하나님도 당신의 삶을 지켜보고 계신다.


나는 나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해본 다음에나 그 행복이란 놈을 만나볼 생각이다. ('1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