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평) ⟪희랍어 시간⟫, 한강 著

내가 ⟪희랍어 시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장르의 문제라고 분명히 해두어야 겠다. 온갖것에 예민해진 나는 지루한 컨텐츠는 참고 보아도, 보디호러는 이제 두눈 뜨고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작품성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묘사를 하는 데 있어 한강은 가히 천재적인 필력을 보여주기 때문. 그녀의 텍스트를 읽다보면 어떠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내게는 썩 유쾌하지 않았던 탓에, 한강의 다른 작품을 선뜻 집어들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실어증에 걸린 수강생 여자의 이야기를 읽기가 힘들었다. 그녀를 괴롭힌 억울한 사건들 (그녀를 물어버린 백구, 이혼과 양육권 패소 등) 안에서 그녀가 겪은 정신 붕괴, 문자가 해체되는 듯한 그 아득함을 함께 체험하는 느낌이라 힘겨웠다. 분량이 많지 않았는데도 읽는 속도가 느렸던 이유이다.
이미지가 주는 임팩트는 꽤나 강렬해서, 실제 실어증 환자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인지 진위 여부는 뒷전으로 밀린다. 더군다나 등장인물의 경험에 한정된 개별성을 주장할 경우, 실어증의 진상은 이 소설에서 힘을 잃게 된다. 이미지의 힘은 인정하지만, 아니 오히려, 이미지의 강력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지배적인 컨텐츠가 꺼려진다.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안 주는 것 같아..
적어도 희랍어 강사는 밝은 면이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서서히 사그라드는 촛불 같은 존재였다. 수강생 여자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젖은 장작 같은 느낌이었는데, 글쎄, 희랍어 강사의 불씨가 말잃은 여자를 소생시켰을까?
별로 궁금하진 않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 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Ch 2 '침묵'
(...) 동양에서 온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희랍어는 달랐어.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 수 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 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네가 말한 그런 이유로 나는 플라톤의 전도된 세계에 이끌렸던 걸까. 그보다 먼저,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 Ch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