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中 - 2부) '벤허', 루 월리스 著, 공경희 譯, 출판사 더스토리
이어서 벤허 2부로 들어가보자.
벤허 1부는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면, 2부는 그로부터 20년쯤 뒤 어느 유대인과 로마인의 기싸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유다 벤허는, 유대민족 중에서 명망이 있고 또 로마인과도 관계가 괜찮았던 허 가문의 아들이다. 벤허는 어릴 적 친구였던 메살라와 오랜만에 조우하게 되는데, 세속적인 로마인으로 변모해버린 메살라의 모습에 벤허가 크게 실망하게 된다. 오로지 상대방 기분 상할 요량인듯 로마의 우월성과 유대민족의 비천한 상황을 거들먹거리는 메살라에게 벤허는 자존심이 크게 상한다. 여기서 벤허는 로마 (혹은 메살라)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방법은 세속적인 수단 (즉, 군 병력 측면)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고, 이러한 뜻을 모친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모친은 벤허가 세속적인 열망을 거두게끔 부드럽게 타이른다.
벤허 가족의 단란함은 2부 말미에 벌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작가 월리스는 벤허와 그의 어머니, 여동생 티르자, 유모 암라까지 해서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상호간 영혼의 떨림을 어찌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지,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공들여 설명한다.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이 일순간에 깨지는데, 내가 벤허였다면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서 제 구실을 못했을거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벤허가 그리던 이상향이 유대민족의 부국강병(?)과 같이 세속적인 열망이었다는 점이다. 메살라에게 긁힌 자존심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나라도 그러한 사고흐름을 따라갔을테다. 하지만 성경 신약을 읽어본 이들은 모두 알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민족의 세속적 독립이 아닌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려오셨다. 2부 마지막에 세속적인 열망을 지닌 벤허와, 영혼 구원의 미션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스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벤허는 나중에 이 장면을 기억하려나.
이쯤하고.. 인상깊었던 구절을 몇 개 가져와봤다.
황제는 아켈라오의 해임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사원의 고위 성직자들의 감정을 해했다. 유대를 시리아의 관할로 강등해 버린 것이다. 시온 산의 헤롯 왕궁은 왕이 없이 2급 관료인 총독이 다스렸고, 그나마도 로마와의 연락은 안디옥의 시리아 특사를 통해야 했다. 게다가 총독은 예루살렘에는 머물지도 않고 가이사랴에 거했다. 하지만 가장 큰 치욕은, 하필 가장 멸시받는 사마리아를 유대와 같은 속주로 묶은 것이었다. 편협한 분리주의자들인 바리새파는 가이사랴의 총독궁 앞에서 그리심 산 신자들에게 밀리고 조롱당하는 게 어찌나 견디기 힘들던지!
- 제2부 제1장 (p.118)
유대민족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주어서 좋았다. 이런 글귀를 읽으니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와 로마의 유대민족 지배가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 깊이 알아보고프다. 왠지 정리해둔 책이나 글이 있을듯.
이 청년의 말투를 글로 정확하기 옮길 수가 없다. 독자의 상상을 믿는 수밖에. 다만 로마인의 특성에서 경건함이 급속도로 사라졌음을, 아니, 경건함을 도리어 고루한 특성으로 여겼음을 지적해야 겠다. 옛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시피 되었고, 기껏해야 사고방식과 표현방식의 표현에 그치게 되었다. 사원 근무가 이득이라는 것을 아는 사제들, 시 구절에 써먹어야 하니까 신을 없애버릴 수 없는 시인들, 혹은 그런 경향이 있는 가수들 정도만 소중히 여겼다. 종교 대신 철학이, 경건함 대신 풍자가 들어섰다.
- 제2부 제2장 (p.124)
벤허야... 네 마음 잘 안다. 하필 메살라 같은 녀석을 친구로 둬서 네가 참 고생이 많다.
"(...) 율법의 어떤 부분들은 때로 불명확하기도 했지만 이 부분은 그렇지 않아. 선생은 직접 아담의 계보를 세 기간으로 추적했단다. 언약부터 성전 건립까지, 거기서 바빌론의 유수까지. 거기서 다시 현재까지. 2기가 끝날 무렵에 딱 한 번 기록이 끊어졌지만, 바빌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스룹바벨이 하느님에 대한 첫 번째 의무로 되살렸어. 그래서 유대인 후손의 계보가 2천년 동안 끊기지 않을 수 있었지."
- 제2부 제4장 (p.148)
구약을 좀 더 꼼꼼히 읽어야 겠다고 느끼는게.. 아직도 성경인물이 헷갈리고, 더러는 선역과 악역마저 혼동되는 민망한 순간이 있다. 스룹바벨도.. 왠지 이름에 '바벨'이 들어가서 괜히 거부감이 들었으나 알고 보니 성전 건축 주역이었던... ㅠㅠ 정진하자.
"(...) 만약 우리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직선과 원을 그릴 거야.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겠어.
'주님은 직선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하게 영원토록 앞으로 나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원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발전이 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의 발자취가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민족의 역사는 다 달라. 다만 그 차이가, 흔히들 말하듯이 원의 면적에, 그러니까 차지한 땅의 넓이에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이 움직여 가는 영역에 있다.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민족이 가장 우월한 거야. (...)"
- 제2부 제5장 (p.152)
벤허를 달래는 모친.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민족이 가장 우월합니다. 아멘.
바리새파와는 달리 사두개파는 예술을 (이교도의 예술까지도) 폭넓게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 제2부 제5장 (p.156)
유대민족 당시 배경설명을 해주어서 좋았다 222
아, 그리고 제2부의 서문은 바이런의 시를 싣고 있는데, 바이런 시를 제대로 접해본 적은 없지만 바이런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을 읽은 바 있지. 바로 내가 애정하는 책, '지적생활의 즐거움' (P.G. 해머튼)에서! 이 토막글을 읽으면서 바이런의 영혼이 열병을 앓았으리라 짐작했는데, 서문에 실린 시를 보니 정말 그랬던 듯 하다.
바이런도 백퍼드와 비슷한 유형의 천재였습니다. 바이런의 가장 아름다운 시들 중 몇 개는 불과 한나절 만에 완성된 작품도 있습니다. 한나절 동안 바이런이 쏟아냈던 집중력은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길어도 하루 이틀이면 세계문학에 길이 남을 명작들이 완성되었습니다. 단순한 재능을 넘어서 그 시들이 완성되기까지 바이런이 감당했던 집중력과 신경과민 상태, 흥분, 절망은 육체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른 상상력이 출발점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에게 잠시의 이완이 더해졌더라면 바이런은 조금 더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책 '지적생활의 즐거움' 중 '다시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