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 경청 (김혜진 著)
민음사에서 나온 장편소설 '경청'을 집어들게 된 건 순전히 민음사티비 유튜브 채널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팀 박혜진 편집자님이 이 책을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다가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 (아래 영상의 4분대에 나온다)
소설을 너무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
말을 해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말을 안 하는 걸 잘하는 영역도 있거든요.
근데 그 (말하지) 못한 걸 너무 잘 썼어...!
방송에서 주어진 대본대로 읽었다가, 사람 하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된 상담사 임해수.
이 이야기는 그러한 해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해수는 자의든 타의든 계속해서 말문이 막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이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소통의 방식이다. 숨은그림찾기. 그녀는 어머니의 말 속에서 어머니가 하지 않는 말을 찾아내고, 어머니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없는 말을 찾는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에 깃든 말들을 짐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길임을 두 사람은 이제 잘 안다.
(115쪽)
태주는 몸을 일으키고 먼저 자리를 뜬다.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고, 인사 한마디 없이, 벌을 주듯 그녀를 그곳에 남겨 두고 가게를 나가 버린다.
(221쪽)
이 일로 해수 씨도 타격을 입었겠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해명도 하고 싶겠죠. 자기 입장, 자기 처지, 사람들이 말하려는 건 결국 그런 거잖아요. 난 그런 거, 반성이라고 생각 안 해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반성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여자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모두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침묵보다 하찮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그 말들이 철저히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결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기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자신과 마주 앉은 저 여자가 그런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녀는 언어로 이해하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아프게 깨닫는다.
(245쪽~246쪽)
두문불출하던 해수의 단조로운 일상에 두 캐릭터가 난입하게 되는데, 바로 길고양이 순무와 초등학생 세이이다.
순무와 세이도 내몰린 존재들이지만, 해수에게 좀체 마음을 온전히 내주려고 하지 않는다.
박혜진 편집자님 말이 맞다. 이 책은 못다한 말을 독자가 헤아리게끔 하는 데서 그 힘을 발휘한다.
소설 속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이다. 차마 표현하지 못한 세이의 마음을 해수가 헤아려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해수의 논란을 세이가 알고도 모른 척 해준다.
못 다 한 말, 차마 하지 못한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비록 본심이 서툴게 표현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말하고 표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러한 곤조는 과거 경험에서 비롯되는데, 할말을 하지 못해서 억울한 일을 겪게 되거나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일이 허다했기 때문.
그런데 이 책은 입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을 비춰주고 있다. 그리고 입을 닫아버렸음에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혼과 마음이 통하기도 하나봐,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한편, LLM이니 뭐니 하며 언어 모델링이 각광받는 현 시대에, 문장도 하나의 데이터가 될 수 있다면.
말을 아끼는 행위는 이 세상에 데이터(흔적)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데이터를 기록하지 않는다.
<랩걸>의 호프 자런이 인공배양을 진행하던 중 예외적인 형태를 띠는 배아를 접하던 순간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었다. 갑자기 이 문단이 연상되네.
I should write down that this one is different, but I don’t. I used to note any oddities religiously, but I do it less and less as the years go by. It feels too much like a confidence that I haven’t been given permission to share. The first green tissues of a radish seedling are two perfectly heart-shaped, symmetric leaves. In twenty years of growing hundreds of these plants, I have seen exactly two deviants, each with a perfect third leaf—a baffling green triad where there should be only a pair. I think of those two plants often, and they even enter my dreams occasionally, causing me to wonder why I was meant to see them. Being paid to wonder seems like a heavy responsibility at times.
이 표본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기록해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조금만 예외적인 것도 종교적으로 기록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일을 점점 더 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과 그것을 공유하기에는 그것이 나에게만 허락된 비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무 싹의 첫 초록색 조직은 대칭을 이루며 완벽한 하트모양을 한 두 개의 이파리다. 20년 동안 이 식물을 수백 개 길렀지만 예외는 단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두 번 다 완벽하게 생긴 세 번째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다. 2인조만 있어야 하는 곳에 당황스럽게도 3총사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 두 무를 자주 떠올리곤 한다. 심지어 가끔 꿈에까지 나타나서 내가 그것들을 목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든다. 무엇에 대해 궁금해하는 직업을 가진 것이 어떨 때는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Chapter 10 of Part 3)